• 문화
  • 백영주의 명화살롱

[명화살롱]일요일의 작은 일탈… 그는 '일요화가' 였다

[백영주의 명화살롱]앙리 루소 '노트르담'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 승인 2015-10-07 15:26
▲ 루소 '노트르담', 1909
<br />
<br />
▲ 루소 '노트르담', 1909


지난해 10월 22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피카소와 천재화가들> 展을 본 친구가 기념품 코너에서 엽서를 샀다며 메신저로 보내왔다. 엽서 뒷면을 꽉 채운 그림은 앙리 루소의 <노트르담>. 다른 유명한 그림도 엽서로 많이 나왔는데 왜 이 그림만을 엽서로 샀냐는 필자의 물음에 친구는 ‘시끄러워야 할 파리가 조용해 보여서’라는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다.


40세부터 미술에 흥미 느끼게 된 루소, 독학으로 일요일마다 그림 그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 기존의 화가들과 달리 고요하게 담아내



친구의 말대로 앙리 루소의 풍경화는 당시의 문화 중심지였던 파리의 이미지와 달리 매우 고요하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화려한 도로나 인파가 북적거리는 광장을 그리지 않았다. 그 생소한 풍경화만큼이나 루소의 이력은 특이하다.

세관원으로 20대와 30대를 보낸 그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40세부터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 그는 “자연 외에 다른 스승은 없다”며 작업실을 갖추고 독학으로 일을 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래서인지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지녔다.


▲ 루소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여행', 1894
<br />
▲ 루소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여행', 1894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세계… 꼼꼼하게 그려낸 요소들 돋보여
기존 예술가들, 지적교육의 방해 받지않은 '위대한 원시화가' 높이 평가



그림으로 부유해진 기성 화가들을 롤모델로 삼아 사실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거리가 있다. 당시 유행하던 빛에 따른 색상 변화도 없고, 원근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 밋밋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기술적인 면은 서투를지도 모르나 꼼꼼하게 그려낸 그의 그림 속 요소들은 모두 동등한 밀도와 중요성을 가진다. 이 꼼꼼한 채색은 그의 대표작인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나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상> 등에서도 나타난다.

1907년 이후 루소의 작품을 열렬히 수집했던 외팅겐은 ‘일요화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벌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망의 원천이자 위로의 수단이며 일상의 압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호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요일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생각과 다른 활동과 다른 삶이 있는 세상을 깨달을 수 있는 여가다. 노동자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은 그를 억누르는 가난과, 낙담하게 만드는 정부의 기만에 반항하는 것이다. 루소는 가난에 대한 원망 없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요일을 기다렸다. 일요일에 전 세계에 걸쳐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이 기쁨이 바로 생의 기운이 된다.”


▲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
<br />
▲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

"루소는 가난에 대한 원망없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요일을 기다렸다
일요일에 전 세계에 걸쳐 기쁨이 두배가 되고 이 기쁨이 바로 생의 기운이 된다"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루소의 장례식 조문객은 7명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 예술가들은 루소를 자연이 이끄는 대로, 지적 교육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작업하는 ‘위대한 원시 화가’로 높이 평가했다. 새로운 예술을 찾기 위해 기존 예술을 잊으려 노력하던 피카소는 루소의 작품을 사 모으곤 했다.

일요일의 작은 일탈에서 시작해 독자적인 예술세계까지 만들어낸 루소. 아마추어의 순수한 감수성이 시대를 앞선 감성으로 프로들에게 재평가된 이 화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필자는 예술엔 경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백영주 갤러리 ‘봄’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