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 취재탐방기] 벌거벗은 채 달려드는 꾸냥의 유혹

4. 말(馬)싸움이 유명한 소수민족 먀오족(苗族)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

  • 승인 2017-06-23 11:09
▲ 먀오족 아이들과 함께, 왼쪽 두번째가 필자/사진=김인환
▲ 먀오족 아이들과 함께, 왼쪽 두번째가 필자/사진=김인환


4. 말(馬)싸움이 유명한 소수민족 먀오족(苗族)

잠드려는데 의문의 노크소리… 문을 열어보니…

이들의 술잔 돌리기 풍습은 이채로웠다.
내가 먼저 한 잔을 마시고 오른 쪽 편에 있는 사람에게 빈 잔을 권한다.
그러면 옆에 앉았던 꾸냥이 잔을 채운다. 왼 쪽으로부터 새로운 잔이 계속 돌아온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 빠르다. 잔은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것이 문제였다.
술병에는 56도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술이 약한 탓도 있지만 그런 속도로 마셔대다가는 곧 인사물성이 되어버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길 밖에 없었다. 옆에 앉았는 왕 국장에게 귀에다 대고 지금 속이 안 좋아 먼저 숙소에 돌아가야 겠는데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슬쩍 빠질 터이니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이야길 했다. 처음엔 내가 빠지면 안 된다고 완강하게 나오던 왕 국장이 잠시 후 나에게 정 그러면 화장실 가는 척 하고 살며시 빠져 나가라고 한다.

그렇게하여 나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똑 같은 건물이 몇 개나 있어서 여관 건물을 찾는데 한참을 헤매야 했다. 다음엔 또 몇 호 였는지 알송달송했다.

다행히 층마다 관리인이 있어서 열쇠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샤워부터 하고 누워버렸다. 침대는 두 개가 있었는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낮잠이나 한 숨 잘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마악 잠이 들려는데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관리인인가싶어 문을 열고보니 왠 꾸냥 한 명이 방긋 웃고 서 있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라고 물어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문을 밀고 들어 온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웃 저고리를 삽시간에 벗어 던지는 게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에겐 아무 얘기도 없이 샤워실로 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아하!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구나! 했었는데 잠시 후에는 좌악 좍 물 끼얹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샤워를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는 벌거벗은 채였고 커다란 수건 한 장으로 앞 가슴만 가리우고 있었다. 얼굴을 가만히 보니 아까 술좌석에서 바로 내 옆에 앉았던 바로 그 꾸냥이었다. 나는 놀래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침착해야만 했다. 그녀를 먼저 침대에 앉도록 하고 옷을 입도록 권유했다. 처음엔 벗은 몸으로 나에게 기대며 애교를 부리려던 그녀가 내가 엄격한 모습으로 재차 옷 입기를 강요하자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온다. 나는 지갑에서 100위안(한국 돈 18000원)을 꺼내 들고 있다가 그녀에게 집어 주었다. 돈을 보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왜 이렇게 많이 주느냐며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다. 나도 그제서야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침대 곁에 앉도록 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장 피엔 쥔이라고 해요.”
“올 해 몇 살이냐?”
“열 여덟 살이예요.”
“누가 널 여기로 보냈느냐?”
“쎈장(현장)이 가라고 해서 왔어요.”

그 쯤 해서 내 짐작이 갔다. 아마 이런 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이들의 습관인 모양인 모양이었다. 나는 차근 차근 내 이야기를 했다. 내 나이가 얼마이며 손자 손녀가 몇 명이나
되며 게다가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랬더니 꾸냥은 “사랑엔 국경도 없고 인종도 없고 나이도 초월하는 게 아닙니까?” 라며 한 마듸 던진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긴 했다.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곳에 나오면 팁은 얼마나 받느냐?” 라고 물었더니, “손님마다 다 틀려요. 20위안(한국돈으로 3600원 정도) 30위안, 또 최고로 많이 받을 때는 50위안도 받어요.” 라고 대답한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했는데 너는 교회에 가 본 일이 있느냐고 묻자 두 번 가 보았다고 한다. 그게 언제였느냐고 되묻자 작년 12월이었는데 교회에서 누군가의 생일이라며 큰 행사를해서 친구를 따라 가 보았다고 한다. 아마 크리스마스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이런 생활을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구해 보라는 것과 교회를 열심히 다녀보라고 하자 직장 구하기가 어디 쉬운 거냐며 자기는 공부도 하지 못했고, 시골에서 갓 올라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가 보라고 했더니 내가 준 100위안을 내 보이며 이 걸 다 가져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좋아서 어쩔줄 몰라한다.

그녀를 내 보내고 자리에 누웠다.그러나 잠은 어느새 다 달아나 버렸다.

1970년 대 우리나라 모습이 회상된다. 일본의 기업이며 공장들이 들어서고 그곳에 숱한 처녀들이 공장을 다니던 시절, 예쁘다는 처녀들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되어야 했던 당시의 모습들이 떠 올랐다. 지금 중국도 그러한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가슴 아픈 일들이다.

▲ 나들이 준비 중인 먀오족 여성들/사진=김인환
▲ 나들이 준비 중인 먀오족 여성들/사진=김인환

드디어 먀오족 촌장집에 도착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왕 국장은 일찍 출발했다. 어제 도착할 때처럼 공산당 서기며 부서기, 쎈장, 부쎈장, 각 국 국장 급들이 두 줄로 도열해 선 채 그를 환송하고 있었다.

왕 국장은 떠나기 전에 공산당 서기며 쎈장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며 신신 당부했다. 참 고마웠다. 왕 국장이 떠나고 한 시간이나 지난 후에 직원 한 명이 나를 안내 한다고 나섰다. 그와 함께 간 곳은 공안국이었다. 담당 과장은 이미 쎈장에게 전화를 받았노라며 먀오족촌에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이 들어가는데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원칙은 우리 직원 한 명이 따라가 보호를 해야 하지만 직원이 부족해 여의치 못 하다며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공안국을 나와 직원은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정류소로 갔다.정류소는 혼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버스 안내양들의 외치는 소리. 어디어디를 간다며 빨리 타라고 외치는 소리,그 사이사이로 장사꾼들이 오가며 물건을 파는 모습, 크고작은 보따리를 들고 메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시골사람들의 움직임들이 그 옛날 한국에서 보던 모습과 똑 같았다.
나와 같이 온 직원이 잠시 후 표를 한 장 사 들고 왔다.

“이 차 종점에서 내리십시오. 그 곳이 바로 먀오족촌입니다. 버스가 도착하면 서기와 촌장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돌아오실 때는 다시 이 버스를 이용 하시면 됩니다. 촌에 가시면 고생하실 터인데 힘 드시면 바로 나오십시오. 돌아오실 때는 꼭 우리 쎈 정부에 들렸다가 가십시오.”

그는 바로 돌아갔다. 고마운 직원이었다. 나는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만원이었다. 내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24인승 중형 버스 안에는 사람보다 보따리들이 더 많았고, 강아지 새끼들과 닭, 오리, 돼지새끼들을 가둔 우리들이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작은 동물원을 연상케 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차 안에서 왠 담배들을 그렇게 피는지 숨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가래침을 아무데나 내 뱉고, 코를 풀기도 예사였다. 유리창은 대여섯 군데나 깨져 있어서 만약 비라도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될 정도였다.

버스가 이 것 한 대 뿐이라니 다른 차로 바꿔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버스 중간 쯤에 자리를 잡았다. 오리, 닭장 옆이였다. 시골사람들의 모습에 동화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제일 고통은 짙은 담배 냄새였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자 버스가 출발했다

앞으로 5시간이 걸린다고 했으니까 그냥 서서 갈 순 없고 한 쪽에 쑤셔넣은 베낭 위에라도 앉아갈 판이다.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수민족 방문이어서 과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만나게 될지 궁금하기만 했다 떠나기 전 직원이 하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소수민족 촌에서 먹고 자는 일이 쉽지가 않을 텐데요, 힘드시면 곧장 나오세요. 그리고 이버스만 타시면 됩니다” 라며 걱정을 보태주던 직원.

버스는 30분 쯤 지난 후부터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수시로 정거하며 손님들을 내려놓았다. 두 시간 쯤 지났을 때는 나에게도 빈자리가 생겨 앉아서 갈 수가 있었다. 차를 탈 때부터 나 역시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 대상 이었다. 수군수근 나에 대한 얘기들이 들려왔다.

창 밖 풍경은 한국의 농촌풍경과 거의 같았다. 크고 작은 산들이 지나치고 작은 시냇물이며 제법 큰 강도 흐르고 있었다. 우거진 대나무 숲도 보이고 바나나 나무가 우거진 숲들도 지나친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며, 소를 타고 지나치는 사람들, 논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가는 지나치고 있다.

버스가 네 시간 쯤 지났을 무렵엔 손님들 모두가 다 내리고 시골 아낙네 두 사람 뿐, 차는 그 많던 손님들이 보이지 않고 허허롭기만 했다. 드디어 버스가 마지막 종점에 도착한 모양이ek. 안내양이 나에게 와서 이제 다 왔으니 내리라고 한다.

버스 종점이라는 곳이 많은 차들이 정차돼 있는 곳이 아니라 부락 한 쪽에서 돌아 나오는 곳이어서 아무데나 넓직한 마당 같은 곳에 버스를 정차시키면 그만인 곳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먀오족촌 서기며, 촌장과 툰장(屯長)이라는 사람 등 세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긴다. 소수민족 촌의 행정 조직이란 촌(村)이 있고 또 그 아래로 최소 부락 단위인 툰(屯)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툰장(屯長)이 얼른 내 배낭을 빼앗다시피 받아 든다 이들이 나를 안내한 곳은 부락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목조 건물이었다.

집들의 구조가 특이하다. 대부분 가옥들이 목조였고 3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돼지우리 아니면 헛간이었고, 2층, 3층에 주거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집마다 마당이 없고 2층에 대문이 있어 문을 열면 바로 집 안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촌장집은 비교적 규모가 컸으나 구조는 똑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부인과 딸이 나를 보고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촌장 부부는 40대 중반 이었다. 2층은 양 쪽으로 방이 하나씩 보이고 중앙은 넓직한 식당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홀 중앙에는 둥근 탁자가 보이고 그 위에로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촌장이 정식으로 공산당 서기와 툰장(屯長)을 소개 한다. 식탁에는 촌장 부인도 앉고 그 딸도 앉았다. 잠시 후엔 얼굴이 볕에 그을려 새카만 남자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온다. 촌장의 아들이라며 인사를 시킨다.

촌장은 두 명의 딸과 아들 한 명이 있다고 한다. 큰 딸은 고등학교 3학년 생으로 도시에 나가 있고 집에 있는 딸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어머니를 따라 농삿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열 일곱 살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다 큰 처녀로 보인다.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했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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