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명월]언로(言路): 선조의 언론탄압

윤희진 기자

윤희진 기자

  • 승인 2015-05-25 13:18

신문게재 2015-05-26 19면

1577년(선조 10년) 한양에 살던 지식인과 양반 30여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권력의 핵심인 사헌부(검찰)와 사간원(언론), 이른바 양사 책임자들까지 경질된 사건이 발생했다.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이들의 죄명을 '여사설사국하이'(與私設史局何異)로 기록돼 있다. 사설(私設)은 민간이 설립함을, 사국(史局:오늘날의 국가기록원)은 사관이 사초를 기록하는 곳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랏일에 대한 기록은 국가의 소관으로, 민간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세계 최초의 역사로 기록될만한 일을 망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전달 수단은 조보(朝報)다. 조정 소식이라는 뜻으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던 기별(奇別)제도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넘어온 이른바, 관보(官報)다. 조보에는 임금의 지시를 비롯해 상소 내용, 과거합격자 명단, 조정의 결재사항, 인사발령, 관리 징계 등을 실었다.

조선 태조 원년에는 예문춘추관, 태종 1년에는 예문관, 세조 때부터는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이 전날 일어난 일을 매일 기록하면 승정원 서리가 필사로 원본을 작성하고 각 도의 관찰사가 근무하는 감영(監營) 소속 기별서리가 베껴 감영으로 보낸다. 조보는 고위급 관리들에게만 배포됐고, 일반 백성은 접할 수 없었다.

선조 10년, 민간 조보가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향리 출신 중인계급의 지식인과 양반 30여명이 '민간 조보'를 발행해 구독료를 받고 팔기 시작했다. 물론, 사헌부 등 관의 발행허가를 얻어 승정원의 조보를 본떠 인쇄조보를 발행했다. 필사한 조보보다 읽기 편하고 돈을 내면 누구나 볼 수 있었으며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의 공주 출산 등의 소식엔 호외까지 발행했다. 그 공주가 바로 MBC 사극, '화정'에 등장하는 정명공주(貞明公主)다.

민간 조보는 세계 최초의 활판 인쇄된 일간신문이었다. 1638년 중국 명나라 때보다 61년 1650년 독일보다 73년이나 앞섰지만, 세계사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다. 선조가 '민간 조보 내용이 타국에 전해지면 나라의 수치를 폭로하는 것'이라며 폐간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선조의 탄압정책으로 인쇄조보는 몇 달만에 폐간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인쇄 조보가 제도화됐다면 지식과 정보의 유통과 확산 등으로 조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광해군에게도 그랬듯이, 선조는 백성을 경계해 조선을 결국 '속 좁은' 나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개혁군주 정조는 달랐다. 1776년 즉위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로(言路)는 국가의 혈맥이다. 혈맥이 막히면 원기가 어떻게 두루 통할 수 있겠는가.”

윤희진·취재 1부 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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