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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만땅] 박제상 "일본의 재상이 되느니 신라의 개, 돼지로"

[원종문의 오복만땅] 67. 신라 충신 박제상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7-09-15 00:00
박제상ggg
경남 양산에 세워진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419) 동상/연합


지금의 경주(慶州)지역이 예전에는 계림(鷄林)이라 불렸는데 경주를 서울로 하여 신라(新羅)라는 나라를 세운 사람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5대 후손인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으로 박제상(朴堤上)이란 사람이 있었다.

박제상의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이란 벼슬을 지낸 물품(勿品)이며 어머니는 보반부인(保反夫人)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402년경 이때 의 신라는 지금의 공주, 부여를 도읍지로 나날이 부흥해가는 백제(百濟)의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백제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신라의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奈勿王)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일본(日本)에 파견하여 일본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백제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신라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잡아 감금하고 신라를 정치적으로 협박하고 있었다.

일본(왜)의 세력을 끌어들여 백제를 견제하려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신라의 실성왕은 이번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왕자를 고구려(高句麗)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지만 이번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복호(卜好)왕자를 인질로 잡아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이 일본에 인질로 감금된 것은 서기 402년이었으며, 내물왕의 둘째 아들인 복호(卜好)왕자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감금된 것은 412년이었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訥祗王)이 417년에 실성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하여 신라의 임금이 되니 왕으로 즉위한 뒤 고구려에 잡혀있는 동생 복호(卜好)왕자와 일본에 감금당해 있는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국가의 중신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논하니 국가적으로 막중한 이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모두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하며 문무가 뛰어나고 화술과 지혜가 탁월한 적임자라 하였다.

서기 418년 눌지왕2년에 왕명을 받들어 박제상은 고구려에 들어가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을 지혜와 언변으로 설득하여 복호(卜好)왕자를 무사히 구출하여 신라로 돌아오니 신라의 임금과 온 백성들의 기쁨이 매우 컸지만 아직 셋째왕자 미사흔(未斯欣)이 일본에 잡혀있음으로 기쁨은 절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박제상은 이번에는 일본으로 즉시 떠났다.

박제상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 셋이 있었는데 남편이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있던 복호왕자를 구출하여 돌아오자 쉴 새도 없이 곧바로 바다건너 왜국으로 또 왕자를 구출하러 떠나려고 하자 부인과 딸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지엄한 왕명이라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으로 간 박제상은 신라에서 죄를 지어 신라를 배반하고 일본으로 도망쳐온 것이라며, 일본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일본왕의 신임을 얻은 박제상은 일본 왕과 관리들을 속여서 미사흔(未斯欣)왕자를 탈출시켜 신라로 무사히 귀국시켰으나 자기 자신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탄로가나 잡혀서 수많은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 왕은 신라를 버리고 자신의 신하가 되면 목숨은 물론이고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회유했으나 박제상은 “왜 나라의 재상이 되느니 신라의 개, 돼지로 살고 싶다“하며 끝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朴堤上)의 발바닥 살가죽을 벗기고 불에 태워 죽였다.

박제상(朴堤上)의 어릴 때 이름은 모말(毛末)이며 본관은 영해(寧海)이고 자는 중운(仲雲)이며 아호(雅號)는 관운당(觀雲堂)으로도 쓰고 도원(桃園)으로도 쓰며, 석당(石堂)으로도 썼다.

고구려와 일본(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신라 왕자 두 명을 구출하고 자기 자신은 일본에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니 그의 나이 57세 되던 해이다.

삼모녀상ggg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박제상 유적지에 세워진 ‘삼모녀상’ 조각상.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이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기다리다 순국소식을 듣고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삼모녀를 조각한 상이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매일 치술령에 올라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으며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어 사당에 모셔져 있으며, 일본에서 아버지가 불에 태워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딸도 치술령 절벽에서 투신하여 죽으니 치술령 고개 밑에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박제상의 딸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때 새가 되어 이 암자가 있는 바위 뒤에 숨어들어 은을암(隱乙庵)이 되었다 한다.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어 사당에 모셔져 있는 박제상의 처와 죽어서라도 날개 있는 새가 되어 훨훨 날아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를 찾아가려는 박제상의 딸들의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박제상 소고, 박제상 설화집으로 전해진다.

언제나 어느 때나 국가에는 충신이 필요하고 충신이 있어왔지만 충신 자신이나 충신의 가족들이 겪은 그 비통함과 참혹함을 어찌 몇 마디 필설로 가름할 수 있으랴.

다만 성명학을 연구하는 필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성명학적(姓名學的)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박제상의 처음 이름은 털 모(毛)자, 끝 말(末)자로 모말(毛末)인데 털의 마지막 끝이란 뜻으로 머리털이나 새털이나 빠지거나 뽑히어 바람결에 날려가는 것이 털이라 단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시대는 402년 신라의 실성왕 시대인데 한자로는 實聖王(실성왕)으로 쓰지만 한글의 발음은 “실성왕”으로 제정신이 아닌 “실성을 한 왕”이라는 뜻도 된다. 국방력을 튼튼히 하고 온 나라가 모든 힘을 다해 나라를 지켜야 마땅하거늘 선왕의 자식들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외세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백제를 견제하겠다는 발상이 실성한 왕의 생각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에 잡혀있던 내물왕의 둘째아들 이름은 점 복(卜)자와 좋을 호(好)자로 점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니, 심신이 나약하여 만사를 점술(占術)에 의존한다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같은 막강한 상대방과 외교능력을 다툴만한 외교사절로는 맞지 않는 이름이다.

일본(日本;倭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내물왕의 셋째아들 이름은 미사흔(未斯欣)으로 아닐 미(未), 이것 사(斯),기뻐할 흔(欣)자를 쓰며 “이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자기 자신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박제상이라는 충신덕분에 풀려나 고국으로 도망쳐왔지만 박제상은 자기를 구하다가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불태워 죽이는 극형을 받았고 박제상의 아내와 딸들까지 투신해 죽었으니 어찌 일본에서 풀려나 목숨을 구한 것이 기뻐할 일이 되겠는가? 참으로 이름은 한글이나 한자의 뜻이나 글자의 획수나 함부로 지어선 안 된다.

누가 언제 말했는지 모르지만 성명학을 “통계학”이라고도 하는데 통계적으로 좋은 이름을 쓰는 사람과, 흉한 이름을 쓰는 사람이 길흉이 구분된다는 놀라운 뜻이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원종문-명인철학관-원장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은 한국동양운명철학인협회 이사, 한국작명가협회 작명시험 출제위원장, 국제 뇌교육 종합대학원 대학교 동양학 최고위과정 성명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명리학 전문과정과 경희대 성명학 전문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름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성명학 총론’, ‘명학신서’, ‘이름과 성공’ 등의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문의 010-6891-7897. 사무실 042)223-7897.

오복만땅컷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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