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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 침묵 속에서 질문하기

유낙준 주교(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강우성 기자

강우성 기자

  • 승인 2017-11-05 12:09

신문게재 2017-11-06 23면

컴퓨터의 한글자판기를 보면 질문의 첫 자음인 'ㅈ'자 옆에 대답의 첫 자음인 'ㄷ'자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 문화에서 질문과 대답은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반면, 영어자판을 보면 질문이라는 Question 의 첫 단어의 'Q'자가 있고 Answer의 첫 단어인 'A'라는 글자는 아래 줄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는 영어문화권에서는 질문과 대답이 다른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한글자판에서는 어쩌면 질문 속에 이미 대답이 있다는 연속성이 숨겨져 있지 않나 싶고, 영어자판에서의 질문은 질문과의 차원과는 다른 새로운 대답을 요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다수 성인들은 대답을 예상하고 질문하는 데 반하여, 성인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기치 않은 대답을 내놓는 이들은 대다수 청년들입니다. 연속선상의 대답과 불연속선 상의 대답이라는 다른 차원의 질문과 대답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를 다시 보면, 어떻게든 묻고 답하는 이는 모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안에서 우리들의 인생과 역사가 흘러왔습니다. 기존의 사회적 질서와 제도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똑같은 대답이 강요되는 시간이 있었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 지반을 요청하는 차원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이 주류가 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우리는 어느 시간대에 서 있습니까.



질문과 대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시대에는 삶의 진정한 표현으로의 열정은 어떻게 흐를까?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은 늘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살지나 않을까?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당혹감이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에, 나는 긴장 속에서 모든 근육이 마비되어 있는 모습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는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무시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 그러다보니 어느 틈엔가 자신만이 올바른 사상을 갖고 있다고 믿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어떤 가치있는 영적 집단에 성실하게 속하지 못한 채 고집과 불통의 교만 속에서 살아가는 부류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에서 나는 이런 방향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늘 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들의 얕음을 보면서, 오히려 더 깊고 고귀한 자리로 들어가는 청년들이 보이고, 노년을 치욕으로 살지 않으며 노인 냄새 나지 않는 노인들이 앞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땅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몸이 커지고 머리가 커지고 영혼이 빛나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룩할 명분이 분명히 있는 곳이며, 여기서 우리는 개인과 사회에게 하등의 득이 될 것이 없고 손실이 전부인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항상 이어질 이 곳은 우리 후세대의 땅이기에 거룩하게 물려주어야 할 곳입니다. 침묵 속에서 걷다보니 인간을 새롭게 할 상상의 질문들이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스스로 묻고 대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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