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오복만땅

[오복만땅] 일본을 제압한 '사명대사'의 이름에 담긴 비밀은?

[원종문의 오복만땅] 75.사명대사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7-11-17 00:00
사명대사
▲ 사명대사가 승군들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대구 임란의병관 게시물이다. <사진 왼쪽> 사명대사 초상으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국가 보물이다./출처=불교닷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본 이름은 "임응규(林應奎)"이다. 풍천임씨 집안에서 1544년에 태어나니 이름을 "응규" 라고 지었는데 "응할 응(應)" 자와 별 규(奎))자를 이름의 글자로 택했다.

별은 하늘을 상징하여 곧 "하늘의 뜻에 응한다"는 이름을 부여 받았다.

예전에는 성인이 되면 이름대신 부명(副名)으로 자(字)를 지어 불렀는데 자는 이환(離幻)이라 했다. 이(離)는 떼어놓을 이자로 이별(離別)이라고 쓸 때도 이 글자를 쓰며 환(幻)자는 변하다,



미혹하고, 홀리는 허깨비 망상을 뜻하는 글자로 사람을 홀리고 미혹하여 허망한 유혹으로부터 떼어 놓는다는 뜻으로 본성을 잃지 말고 사람답게 바르게 살라는 이름인 것이다.

사명대사 임응규(任應奎)는 열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 열네 살 때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어린 소년이 의지할 곳도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황악산의 직지사(直指寺)로 들어가서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이 되니 유정(惟政)이라고 하는 법명(法名)을 받게 되는데 "생각할 유(惟")자와 "정치 정(政)"자로 정치를 생각한다는 뜻이 되는데 불교에 입문했으면 자나 깨나 부처님을 생각함이 마땅할 터인데 부처님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고 정치를 생각하라는 법명을 부여 받았다.

직지사 신묵(信默)스님의 제자가 되어 법문을 배우고 3년 만에 승과시험에 합격하여 본격적인 불자의 길을 걷는다. 승과 시험에 합격한 뒤에 더욱 심오한 불법을 배우고자 직지사를 떠나서 묘향산으로 찾아가서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만나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다음해에는 해인사에 가서 머물며 불법(佛法)과 선리(禪理)를 탐구하다가 다시 휴정(休靜)서산대사를 찾아 도를 깊게 하다가 대구 팔공산으로, 강원도 금강산으로 강원도 태백산, 청량산 등명산을 답산(踏山)하며 깊은 학문과 진리에 정진했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부산을 진격하고 우리국토를 파도처럼 휩쓸고 짓밟으니 분연히 일어나 승병을 모집하고, "일본은 동쪽에 있는 섬나라로 태양을 뜻하는 해일(日)자와 근본 본(本)자 일본(日本)이라 쓰고, 그들의 깃발도 태양빛을 본떠서 일장기(日章旗)를 만들어 앞세우고 우리강토를 짓밟으니 불은 불로 제압하는 것" 이라면서 스스로 이름을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물바다" 라는 뜻으로 "사명(四溟)"이라고 지어 바꾸니 명(溟)자는 바다 명자다.

사명대사는 승병을 모아 유점사(楡岾寺)라는 작은 절에서 시작하여 인근의 아홉 개 고을에서 일본군을 격멸하고 백성을 구출하고 순안으로 달려가서 서산대사와 합류 하게 된다.

여기서 이천 여명의 승병들을 이끌고 '의 승도대장(義 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큰 전공을 세우고 서울 삼각산 전투에서도 크게 왜적을 물리치니 선조 임금께서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 양종판사(禪敎 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후에 사명대사는 네 차례 에 걸쳐 일본 왜장 가등청정(加?淸正)과 회담을 하여 일본의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요구를 척결하였다.

사명대사는 선조 임금에게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疎" 란는 제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란 뜻의 상소이다.

이 상소문은 그 문장이 웅장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보민토적(保民討賊)곧 백성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하는 깊은 전술적 병법이론을 전개함은 물론이며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방안까지 제시하여 만인을 놀라게 하였다.

첫째 모든 국민을 총 동원하여 물샐틈없는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하여야 한다.

둘째, 적을 교린 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에 농업을 장려하며 민력을 무장하여야 한다.

셋째, 전쟁에 필요한 제반 군수물자를 사전에 충분하게 비축하여야 한다. 등의 내용이다.

민력(民力)을 기르기 위해서는 실천 방안으로 목민관을 가려 뽑아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척결 할 것과, 일시적으로 임시방편적인 강화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뽑을 때는 인물본위로 등용하여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 적지적소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이며, 국가의 기강을 쇄신하고, 풍기 문란함을 철저하게 뿌리 뽑고, 민력을 키워 백성의 사기를 높이고, 군정확립의 본을 보일 것, 백성들이 소를 많이 길러 생활에 윤택하도록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미와 마초(馬草)를 비축하고 방어 무기를 갖출 것. 승려들도 일반 백성들과 동등하게 처우하여 국가방위에 일익을 담당하도록 할 것 등이다.

이러한 국가안위에 대한 사명대사의 신념은 실행으로 결과를 도출하였으니 사명대사의 손길로 대구의 팔공산성(八公山城)과,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이 있고,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부산성(釜山城)등이 사명대사께서 축성하신 산성들이다.

사명대사께서는 군수물자 제조에도 힘썼으니 합천 해인사부근의 야산에서 치로(治爐)를 만들어 쇠로 화살촉 등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조종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604년에는 선조의 부름을 받고 사신으로 일본 땅에 건너가서 8개월 동안 머물면서 일본과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담판하여 임진왜란 전쟁 때에 포로로 잡혀간 우리백성 3000여명의 동포를 구출하여 1605년에 귀국하였으며 그해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의 영전에 참배하고 1610년 8월 26일에 설법을 마치고 않은 채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식을 거행하고 홍제암(弘濟庵)옆에 부도와 비를 세우고, 경상도 밀양의 표충사와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 과 "분충서난록(奮忠?難錄"

이 사명대사의 저서로 전해지며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리니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원종문-명인철학관-원장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은 한국동양운명철학인협회 이사, 한국작명가협회 작명시험 출제위원장, 국제 뇌교육 종합대학원 대학교 동양학 최고위과정 성명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명리학 전문과정과 경희대 성명학 전문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름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성명학 총론', '명학신서', '이름과 성공' 등의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오복만땅컷최종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