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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4.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가지 않았더라면

명성(名聲)은 실천(實踐)에서 나온다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7-12-15 00:00
게바라
체 게바라의 50주기를 맞아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사진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출신 미술가 짐 피츠패트릭이 제작한 팝아트 작품을 담았다. [EPA=연합뉴스]
얼마 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의사 3만 명(주최 측 추산)이 현 정부가 추진하는 '문재인 케어'의 핵심인 '비급여 진료항목의 단계별 급여화'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위가 쿠바에서도 가능할까?

지금도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회자되는 체 게바라 외에 20세기 대문호 헤밍웨이와 쿠바의 대표 농작물인 사탕수수를 증류시켜 만든 럼주는 쿠바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일등공신이다. 쿠바는 이밖에도 세계적인 의료선진국으로도 소문이 짜한 국가다.

그렇다면 쿠바는 어찌 하였기에 세계적 의료선진국이 되었을까. 지난 2010년 10월 10일자 의대생신문의 '쿠바의 의사들' 기사에 그 답이 나온다. "세계 재난지역에 파견된 의사들, 그 주역에는 쿠바의 의사들이 있다"는 보도로 기사가 시작된다.



- 국민 1인당 의사비율 최고, 1세미만 영아사망 1000명당 4.8명(미국 6.7명), 국민평균수명 78.7살(미국 78.4살). 미국을 뛰어넘는 이 기록들의 주인은 쿠바이다. 쿠바는 체게바라와 카스트로가 주도한 혁명으로 1959년 1월 1일 사회주의 국가가 된 나라다.

혁명 당시 쿠바의 의사 6000명 중에 절반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 때 쿠바에는 의과대학 1개가 있었고 교수는 단 16명이었다. 이런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고 선진 의료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쿠바의 의료는 1차 의료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쿠바의 의료는 3단계로 구성된다. 1차 가정의, 2차 지역진료소, 3차 종합병원이 그것이다. 가정의는 약 150가구, 600명을 배정받아 책임지고 돌본다. 오전에는 병원으로 오는 환자를 진료하고 오후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가정방문을 한다.

가정의 제도는 질병치료중심의 의료에서 질병예방중심의 의료로 중심이 옮겨간 방법이다. 가정의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환경적, 정서적 문제도 파악하고 있으며 질병의 약 80%를 치료한다.

가정의가 감당하지 못하는 나머지 20%는 2차 지역진료소가 감당하며 여기서 감당할 수 없는 질병은 3차 종합병원이 담당한다. 쿠바의 빈틈없는 의료시스템을 누리기 위해 국민들은 한 푼의 돈도 내지 않는다.

"모든 국민은 무상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들에게 의료를 무료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쿠바헌법 제 50조에 명시된 이 권리는 쿠바 국민의 99%가 골고루 의료해택을 누리게 한다. 특히 쿠바가 영아들에게 무상 제공하는 의료는 인상적이다.

쿠바의 건강한 어린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열네 살까지 총 162회의 의사의 방문 진료 서비스와 무료 예방접종을 받는다. 임산부는 지역산전센터에서 규정상 최소 12회 이상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가난하거나 위험요소가 있는 임산부들은 산전센터에 머물며 영양관리를 받는다. 이 제도는 낮은 영아사망률을 이끌었다. 쿠바가 뛰어난 의료수준을 가진 이유는 제도 때문만은 아니다. 쿠바 의사들의 봉사정신은 높은 의료수준의 또 하나의 기둥이다.

1963년 이후 세계 101개 나라에 10만이 넘는 의사들이 무료 의료봉사에 참여했다. 쿠바의 의사들은 그들의 손길이 필요한 어는 곳이든 나타난다. 2005년 8월 파키스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 어떤 구호단체도 지진의 위험을 감수하고 히말라야 산맥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베네수엘라 빈민촌에도 그들은 있다. 베네수엘라 빈민지역 무상의료운동 '바리오 아덴트로'에 참여하는 의사는 대부분 쿠바 의사들이다.

돈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시 세상을 보여주는 일도 한다. '기적의 작전'으로 불리는 이 유명한 프로젝트는 수 만의 빈민들에게 시력을 돌려주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무료로 의료교육을 시킨다.

의료 봉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자체적인 의료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의사들의 봉사정신은 이런 실적들로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아이의 순수한 미소, 부모의 감사하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한 쿠바의 의사의 말에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쿠바의 의료수준은 높고 의료 관광국으로의 명성은 두텁다. 이런 높은 의료수준은 근본적으로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국방비의 55%를 삭감해 교육, 의료에 투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의료는 무상의료가 힘든 시스템이고 의사들이 무료봉사를 활발히 하지 않는 것도 사실 사회시스템상의 열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돈, 편안한 삶,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많은 의사에게 혹은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바람직한 의사의 모습을 생각할 기회를 준다. -

쿠바 하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체 게바라다. 체 게바라(Che Guevara)는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정치가이며 혁명가였다.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가담하였고 라틴아메리카 민중혁명을 위해 싸우다 볼리비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된 데는 진보적 성향의 어머니 영향이 컸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53년엔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이후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혁명에 뛰어든다. 1957년 반군부대의 대장을 맡았고 쿠바 바티스타 정부군과 싸웠다.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하여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 정권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군에게 점령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61년 쿠바를 침공한다.

쿠바는 미국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소련을 방문하여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을 배치하여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협상으로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의 조치에 실망하여 다시 게릴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1965년 4월 소련과의 갈등으로 쿠바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체 게바라는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의 형성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난다.

그는 콩고에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그의 혁명 동지들과 게릴라 활동을 펼치지만 혁명연합이 와해되고 콩고 좌파세력들의 쿠바인 철수 요구로 성과 없이 쿠바로 돌아오게 된다. 쿠바에 돌아온 이후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1966년 가을 볼리비아에 잠입했다.

그렇지만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포위되어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체 게바라는 다음날 곧바로 총살당하였다. 외국이나 우리나라 역시도 의사는 높은 수입(급여)과 사회적 명망이란 '두 마리 토끼잡이'가 가능한 직업이다.

따라서 만약에 체 게바라가 여타의 의사들처럼 자신의 영달에만 몰입했더라면 50년 이상이나 호평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그에 대한 인기 역시 진작 포말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가 볼리비아에 가지 않고 쿠바에 붙박이로 눌러 있었더라면 그처럼 허무하게 일찍 사망하진 않았으리라.

아울러 그가 거개의 의사들처럼 세속적 사람이었다면, 그러므로 개인적 부의 축적을 위해서 혁명 당시 다른 의사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했더라면 그는 일개 범부(凡夫)로서의 생을 마감하는데 그쳤을 것이다.

때문에 그를 보자면 명성(名聲)은 실천(實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물론 지금의 쿠바 의사들은 대부분 한 달 수입이 극히 적어서 가족 부양은 고사하고 집세를 내기도 버거운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봉을 견디지 못하고 쿠바를 떠나는 의료진이 늘면서 '의료 강국' 쿠바의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어쨌거나 쿠바가 부동의 의료 선진국이 된 건,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집중적인 의료 육성 정책 덕분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체 게바라의 민중을, 더욱이 빈민을 더욱 사랑했던 이타심이 동인(動因)이 아니었을까 싶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백세인생'이란 얘길 자주 하고 있다. '백세인생'은 무명가수의 설움을 한방에 씻어준 가수 이애란의 히트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지금도 어려운데 빈곤의 노후라고 한다면 그건 외려 비극이다.

의료비조차 없어 혼자서 쓸쓸히 사망했다는 독거노인의 어두운 뉴스가 이런 염려의 근거다. 체 게바라의 불변한 명성에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던 누군가의 명언이 기억의 창고에 묵직하게 들어선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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