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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10. 허균이 초야에 묻혔더라면

지난날의 인물에게서 배운다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1-09 00:00
계량
계량 영정
'계량'은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출생했다. 계량은 본명이 이향금이며 기생첩(妓生妾)의 여식으로 태어나는 아픔을 겪었다. '매창'은 그녀의 호이며 '계생'으로도 불렀다. 계량은 어려서 한문과 시문을 익혔고 후일 기생이 되었다.

가사와 한시·시조·가무·가야금에도 능했던 계량은 신사임당·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녀는 전북 부안의 기생으로 개성 기생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쌍벽을 이룬 기생이었다고 한다.

황진이가 가야금에 뛰어났던 반면 매창은 거문고에 뛰어났다.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박연폭포를 '송도3절'이라고 했다면 매창과 유희경, 그리고 직소폭포를 '부안3절'이라고 했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천민출신의 풍류객이자 대시인이었다.



예(禮)와 상례(喪禮)에도 밝아 국상에서부터 평민들의 장례까지 집례(執禮)했다고 한다. 부안을 찾은 쉰 살 유부남 유희경과 열아홉 살 기생 매창은 뜨거운 사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뜨거운 사랑은 물거품처럼 허물어졌고 기나긴 이별을 한다.

유희경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당상관의 통정대부까지 승진하였고 다시 종2품 가의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정2품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계량은 비록 기생이긴 했으되 유희경을 오매불망 사랑하다가 광해군 2년, 그의 나이 38세에 짧은 삶을 마감했다.

반면 유희경은 92세까지의 천수를 누렸다. 계량은 출신 성분 때문에 비록 기녀가 되었으나 몸가짐이나 행동이 올바르고 절개까지 곧았다고 한다. 유희경을 의식하여 수절했다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다.

글을 짓는 능력까지 뛰어났던 그녀는 글을 더 배우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 몰래 남장을 하고 서당에 다녔다. 당시엔 여자들에게 글을 안 가르친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자들은 비극적 삶을 강요당했다.

조선은 유교에 뿌리를 둔 나라였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유독 강조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 깊어져서 남녀 사이의 차별이 이전보다 심해졌다. 여자는 재산을 물려받을 때도 차별을 받았고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다.

남자아이들이 서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배울 때도 여자아이들은 '고작' 수를 놓고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일 따위뿐이었다. 밖에 함부로 다닐 수도 없었고, 나갈 일이 있을 때는 꼭 쓰개치마(예전에 부녀자가 나들이할 때, 내외를 하기 위하여 머리와 몸 윗부분을 가리어 쓰던 치마)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집안 족보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었으며, 남편이 죽으면 다시 결혼할 수도 없었는가 하면 이혼조차 쉽지 않았다. 아무튼 계량은 남장을 하면서까지 서당에서의 공부를 자청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쫓겨나는 바람에 새삼 성별과 신분에서 차별을 절감하고 기생이 되었다.

-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 비취색 치마엔 아직 향내가 남아 있는데 /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 /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 => 묘구감금금(妙句堪擒錦)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 투도래하계(偸桃來下界) 절약거인군(竊藥去人群) 등암부용장(燈暗芙蓉帳) 향잔비취군(香殘翡翠裙) 명년소도발(明年小桃發) 수과벽도분(誰過?濤墳)

위의 글은 그와 정신적 사랑을 나누었던 기생 매창(계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이 남긴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시다. 교산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 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허균(許筠)은 조선중기 사회모순을 비판한 문신 겸 소설가였다. 또한 당대 명가의 후예로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허균의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균과 동복의 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이 있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허균은 평소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어서 여러 명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으며 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서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요즈음 같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기생 계량과 정신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활을 하였다. 영화 '사도'를 보면 사도세자가 박수무당과 함께 사당에서 북을 치며 옥추경(玉樞經 = 도가(道家) 경문(經文)의 하나. 맹인(盲人)이 외워 읊는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꼬장꼬장한 임금 영조가 모른 체 할 리 없었다. 가뜩이나 미운털이 잔뜩 박힌 세자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허균 역시 마치 사도세자와도 같은 파격의 행보를 보였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 동원된다. 평소 허균은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言)을 듣고도 붓만 들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고 전해진다.

허균의 관직 생활은 선조 27년(1594) 과거 급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사는가 하면 자기를 시종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서 거침없이 행동하면서 청탁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허균의 정치적 생애는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칠서지옥이란,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심전의 서자 심우영, 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상산군(商山君) 박충간의 서자인 박치인과 박치의, 그리고 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를 말한다.

이 옥사는 평소 신분적 울분을 안고 생활하던 이들 7명의 서자가 옥사가 발생하던 이전 해에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사건으로 비롯되었다. 이 옥사는 서자들의 죄를 다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7명의 서자 가운데 심우영은 허균의 제자이기도 할 정도로 허균은 평소 이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허균도 이 일로 인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옥사에서 허균의 관련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의 입장에선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후원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허균이 선택한 인물이 당시 대북세력의 실력자인 이이첨이었다. 허균과 이이첨은 같은 글방 동문이었다.

좌고우면 끝에 허균은 당시 실력자 이이첨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옥사에서 일단 화를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호조참의와 형조판서 등을 지내는 등 정권과 밀착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하였다.

그건 바로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을 비롯해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하지만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民家)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렀다.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도 능지처참이었기에 참혹함마저 남달랐다. 허균은 계량을 사랑했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나누었다고 한다. 계량의 진짜 연인은 유희경임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계량에게서 배울 점은 그녀의 남다른 학구열(學究熱)이다.

얼마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심했으면 심지어 남장까지 해가면서까지 서당엘 다니려 했을까! 다른 건 다 오르는데 내 남편의 급여와 아이의 성적은 그대로라는 푸념을 곧잘 듣는다. 하지만 계량만큼의 치열한 학구열이 담보된다면 소위 SKY대학 역시 누워 떡먹기가 아닐까 싶다.

만약에 허균이 계랑을 만난 뒤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이란 곳은 하루도 조용한 곳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그랬다면 그의 비극적 삶 역시 없었지 않았을까 싶다. '미인박명'이라곤 하지만 계량의 짧은 생애 역시 안타까움에 무게를 더한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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