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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만땅]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많은 성씨는?

[원종문의 오복만땅] 87. 최씨(崔氏)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2-23 11:02
최치원
신라 말기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
최(崔)씨 성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많은 성씨에 속한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최씨는 326본(本)으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의 여러 성씨들 중에서도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성씨가 최씨(崔氏) 가 된다.

최씨(崔氏) 성의 연원을 찾아보면 서력기원전 50년경에 신라(新羅) 서라벌 6부촌 중에서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 사량부(沙粱部)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최 씨의 원조(元祖)로 하고 있다.



신라 말기 857년에 태어난 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선생은 소벌도리의 24세손에 해당되며 최치원 선생보다 위 세대에서 분파된 본(本)으로는 개성최씨(開城崔氏)가 있는데 개성최씨의 시조는 지금의 평안북도 중화군 사람으로 신라에서 대상(大相)이란 벼슬을 지낸 최우달(崔佑達)로 알려져 있다. 개성에서 여러 대를 이어가면서 호족(豪族)이 되었음으로 그의 후손들이 개성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최우달(崔佑達)을 시조로 모신다.

삭녕최씨(朔寧崔氏) 소벌도리의 후손 중에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벼슬을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로 하며 삭녕정언동(朔寧正言洞)에서 여러 세대를 살다가 정언동을 평장동 으로 개칭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삭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동주최씨(東州崔氏)는 소벌도리의 22세손 계양성(桂陽聖)의 증손자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통합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重大匡)벼슬을 지내고 태사(太師)직위에 오른 최준옹(崔俊邕)을 시조로 하는데 예전에 철원(鐵原)에 오래 살았으며 철원의 옛 이름이 동주(東州)라서 그의 후손들이 동주를 본(本)으로 하여 동주최씨 의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전주최씨 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역시 소벌도리의 후예이며 고려 초에 평장사 벼슬을 지내고 지금의 전주가 옛 이름은 완산(完山)인데 완산지역의 방백을 지낸 최언휘(崔彦?)의 혈손이라고 하며 고려 에 문과급제를 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벼슬을 지내고, 완산개국 백(完山開國 伯)에 봉해진 문열공 (崔純爵)을 시조로 하고 전주(全州)를 본으로 쓰고 있다.

신라 말기인 857년에 태어나 대 학자로 명성을 크게 떨친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어머니가 황금돼지(金猪)에게 납치되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달 뒤에 사내아이를 출산하니 그의 아버지가 아기를 강보에 싸서 멀리 있는 무인도 섬에다 버렸더니 구름이 모이고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아기를 보호하였다는 이야기가 "최 문헌집"이란 책에 전해진다.

그의 부모가 기이하게 여겨서 다시 데려다 길렀는데 이름을 치원(致遠)이라 한 것은 보낼 치(致)자와 멀 원(遠)자로 멀리 보냈다는 뜻의 이름이며, 자(字)를 고운(孤雲)이라고 지은 것은 구름이 모여들어 외로운 아기를 감쌌다는 뜻이 들어 있다.

해운대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며 성장하여 아호를 해운(海雲)이라 하였는데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이 뛰어 났으며, 생각함이 남달랐다고 한다.

12살 되던 해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린 최치원에게 이르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하였는데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에 예부사랑 배찬 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선주표수현위"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 황소의 난 이라고 하는 전란이 일어나자 최치원은 종시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조정에 올려서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그의 문장력은 당대의 세인을 감동시켰고 천하를 감탄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29살에 신라로 돌아와서 신라 헌강왕에 의해서 한림학사 수병 부시랑에 임명되고, 진성여왕 8년에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국정의 혼란을 바로 잡았으며, 아찬 이란 벼슬에 올랐으나 관직을 떠나 예전에 태수를 지냈던 전라북도 정읍의 무성서원 등 여러 고을을 둘러보고, 명산 영남의 명산 금오산과 청량사, 해인사와 쌍계사, 영월대와, 해운대, 임경대와 학사루를 유람하며 쌍계사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글을 짓기도 했다.

자유분방하게 어느 한곳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으로 바닷가로 우거진 숲속으로, 기암괴석 바위 위로 때로는 기이한 화초를 기르며 시를 짓고 자유롭게 살았으나 최치원에 얽힌 수많은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은 말년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에 올라서 여생을 보내다가 고려 광종 25년에 95세의 나이로 선화(仙化)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최치원은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내서 "계림은 수명이 다해 누렇게 변해가는 시들어가는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기운이 넘치는 푸른 솔" 이라며 신라는 곧 망하게 되고 왕건의 고려가 새로 크게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기인(奇人) 최치원 이후에 분파된 최 씨로는 함양최씨, 청주 최시, 영흥최씨, 용강최씨, 수원최씨, 부안최씨, 강릉최씨, 화순최씨, 통천 최씨, 양주 최씨, 원주 최씨, 등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최 씨는 신라 시대에 크게 번창하여 고려에서 더욱 세력을 떨친 "경주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해주 최 씨와 우 봉 최 씨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세력을 떨쳤으며, 전주 최 씨와 강릉최씨, 동주 최 씨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세력을 펴서 최 씨는 우리나라에서 김씨(金氏)와 이씨(李氏)와 박씨)(朴氏에 이어서 네 번째 성씨에 올라 있다.

성씨(姓氏)는 그 집안 가문의 뿌리이고 이력서이며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여러 성씨의 유래와 내력을 담아 돌에 새겨서 모아놓은 대전 중구에 있는 "뿌리공원"은 전국에서 대전밖에 없는 유일한 명소(名所)이며 이곳의 지명(地名)도 "만성산(萬姓山)"으로 모든 성씨가 모여 있다는 뜻이 지명으로 되어있고 입구 길목에는 만성교(萬姓橋)가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주말이나 휴일에 온 가족과 함께 꼭 찾아볼 자랑스러운 명소(名所)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원종문-명인철학관-원장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은 한국동양운명철학인협회 이사, 한국작명가협회 작명시험 출제위원장, 국제뇌교육대학원 성명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명리학 전문과정과 경희대 성명학 전문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름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성명학 총론', '명학신서', '이름과 성공' 등의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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