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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29. 박열 선생이 남한에서 영면하였더라면

어떤 아쉬움

입력 2018-03-13 00:00   수정 2018-03-13 00:00

박열
박열(朴烈)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1923년 천황 암살을 실행하려던 중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열의 초명(初名)은 준식(準植)으로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천황 암살을 실행하려던 직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천황 암살을 위해 해외에서 폭탄을 수입하려 했다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며 1926년 3월 25일에 가네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둘이 일본검찰의 문초를 받을 때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일본 판사가 촬영하여 사진이 사회에 누출되자, 정부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우대한다고 야당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복역 중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여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으나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박열은 1945년 8·15광복으로 무려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박열의 저서로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이 있으며,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은 두산백과에서 찾아본 박열 선생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차고도 넘친다.

그럼에도 박열에 관한 기록은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빈약했던 게 사실이다. 추측하건대 이는 그가 북한으로 간 때문이지 싶다. 박열은 곧 '아나키스트'라는 별칭으로도 쉬 불리는 인물이다. 아나키스트(anarchist)는 무정부주의자를 뜻한다.

<아나키스트 박열>은 손승휘의 장편소설이며 책이 있는 마을에서 출간했다.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박열은 일본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그 즈음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여인이 가네코 후미코다.

그들은 민족(民族)은 달랐지만 바라본 세상은 같았다. "조선의 모든 고개는 아리랑고개입니다"라고 말하는 박열에게 호감을 느낀 가네코는 인삼 행상을 하면서까지 박열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가네코는 배고픔과 헐벗음, 추위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존감'을 잃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목을 매달고 자살하기에 이르는데 그의 나이 불과 스물네 살이었다. 가네코는 1903년 1월 25일에 태어나 1926년 7월 23일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녀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였는데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에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곤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후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한 때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나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에게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 노동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되는데 박열을 만나는 것도 이 즈음이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고 흑도회에 가입하여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뜻을 같이 하였다. 1923년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는데 그해 가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 당한다.

그리곤 천황을 암살하려 한, 소위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 받았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죽었는데 자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타살 의혹이 없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고 한다. 소설 <아나키스트 박열>을 보면 박열이 일본의 부유한 귀족 출신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를 찾아가 당시로선 거금인 1000엔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에 쓰려고?"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할 작정이오." 이에 크게 웃은 아리시마는 박열이 요구한 액수의 열 배인 1만 엔을 준다. 박열은 그 돈에서 딱 1000엔만을 들고서 일어나는데 여기서 그가 진정한 남아임이 새삼 입증된다.

누구도 보지 않는 현장이었기에 슬쩍 딴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박열은 그리하지 않았다. 통까지 컸던 아리시마는 얼마 뒤 아키코라는 유부녀와 동반자살하기에 아쉬움을 크게 남긴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다. 도쿄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문명 개화의 기풍에 익숙하였고 미션스쿨에서 서양 사상을 몸에 익혔다. 학습원을 거쳐 1896년 삿포로농업학교에 진학하였고 1903년부터 1906년까지는 미국의 해이포드대학과 하버드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대표작에 [카인의 후예], [태어나는 고뇌], [어떤 여자] 등이 있는데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 함께 자살하면서 삶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는 그가 부르주아 출신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계급분열 사회에 살고 있다는 모순점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차차 자기부정으로 기울어 허무적인 절망감을 보였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그가 생존 시 박열과 의기투합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발동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힘도 없는 민족이 외교로 무슨 성취할 것이 있겠는가? 강국인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는 오직 무력만이 필요할 뿐이요"라고 강조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의 말을 좇아 박열은 폭탄 반입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나 '김상옥 사건'의 여파로 말미암아 조선의 폭탄은 전부 압수당했다는 이소암의 절망적인 편지가 도착하면서 박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위에서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이 야박하다고 꼬집었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항일투쟁은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일만으로도 일제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김상옥 의사는 경성에서 대규모 일본 무장 경찰과 무려 10일간이나 총격전을 이어 가는 전대미문의 쾌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일제에 붙잡히기 전엔 마지막 남은 총알 1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1923년 1월 22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같은 생을 마감했다. 어쨌든 박열과 가네코는 누명을 쓰고 목숨을 내어놓는 대신, 재판정을 일본의 천황과 동등한 대결의 장으로 이끌어내면서 일약 화제의 인물로 부상했다.

1948년에 귀국하였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된 박열은 그동안 대부분의 유명 독립운동가의 명성에 비하면 인지도가 크게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의 삶보다도 치열하고 드라마틱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으며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한다. 이후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延安派)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은 남한에서 물러나면서 수많은 남한 인사들을 납북하여 북으로 끌고 갔다. 그러한 까닭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전향시킴으로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혁혁한 항일투사들까지도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걸 보임으로 인해 북한의 많은 사람(인민)들이 더욱 굳건한 충성을 하도록 그 분위기를 조성코자 만드는 작업의 수순일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박열은 북한 평양의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고, 가네코는 경북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 옆에 묻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분단의 북한이야 가지 못한다지만 문경의 가네코 묘는 꼭 한 번 찾고 싶다.

끝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열 선생이 남한에서 영면하였더라면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일제강점기 시절 재판정까지 신랄하게 유린했던 아나키스트 박열 선생을 흠모하는 인파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았을까.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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