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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쇠락한 공간 재창조하기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입력 2018-04-15 19:57   수정 2018-04-15 19:57

양성광
양성광 이사장
얼마 전 대전에서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몇몇이 의기투합해 서울의 벤처 생태계를 둘러보자는 이야기가 오갔고, 지난 13일 어찌하다 보니 30여명의 대군단이 버스 한 대를 빌려 다녀오게 됐다.

D.CAMP, 마루180, WeWork 등 국내 최고의 벤처창업 성지에 대한 이날의 순례는 나에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공간 속에서 일한다면 머리가 굳어버린 나도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마다 세련된 소재와 감각적인 색조로 만들어 낸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들른 성수동의 한 카페는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놀라움을 안겨줬다. 이 카페는 삐죽이 솟은 빌딩 숲 너머 다 낡은 연립 주택과 옛 공장 건물, 창고 등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한편에 들어서 있었다.

외관은 1970년대에 슈퍼로 시작해 식당으로, 다시 정비소와 공장으로 변해가며 쓸모없는 부분은 부수고 필요한 부분은 덧붙여진 모습 그대로였다. 내부도 바닥에 묻은 페인트 자국, 덧대어진 벽돌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무너져 내린 잔재를 정리하고 가구와 주방, 계산대 등 필요한 최소한의 소품만 사용해 현대식으로 재창조하니 1970∼80년대의 과거와 2018년 현재가 공존하는 대단한 공간으로 변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켜켜이 덧칠해진 벽면을 보며 고단했던 부모 세대들의 삶을 추억하는 젊은이도 생겨났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커플들도 찾게 됐다. 여기저기 서로 다른 시간대에 흩어져서 담소를 나누며 음료를 마시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지친 삶을 잠시나마 내려놓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람이 창조한 공간의 가치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또 사람의 왕래가 잦거나 뜸함에 따라 변한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찾는 이가 뜸해지고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헐고 다시 짓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나 보다.

그렇지만 성수동 카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에 스토리를 입히면 죽어 있던 벽돌 하나하나가 다시 살아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건물의 가치를 높인다.

좋은 공간은 건물 창틀에 달린 쇠창살 하나까지 섬세하게 디자인돼 사람과 대화한다. 사람이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찾게 된다면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공간과 소품들은 비로소 자신의 스토리를 얘기하며 우리 내면의 감정과 교감하게 된다.

우리 주변엔 시간의 흐름 속에 스러진 그런 공간들이 많이 있다. 그곳은 나만의 공간일 수도 있고 우리 기관 또는 우리 커뮤니티의 공간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공간을 헐고 다시 지우려면 막대한 예산이 들어 흉물처럼 그대로 방치된 경우가 많다. 1979년 유치과학자들의 주거시설로 대덕연구단지 관문에 지어진 대덕공동관리아파트가 딱 그렇다. 이 아파트는 시설이 노후화되면서 관계 기관들이 재건축, 매각 등 여러 방법을 놓고 고민했으나,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지금은 모두 손을 놓은 상태다.

안타까운 것은 모두 다 땅의 가치에만 관심을 가지고 건물에 얽힌 역사와 사연의 가치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기를 이끈 과학자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자, 국가가 부른다고 해외 기반을 툴툴 털고 생경한 대덕에 둥지를 튼 과학자들을 위해 국가가 마련한 자그마한 보상이었다.

대덕특구가 50년, 100년이 됐을 때 이 부지에 새겨진 역사와 사연은 다 스러지고 아파트만 덜렁 남았다고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매봉산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뭐라고 하는 우리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는다면 창피하지 않을까.

이제는 여기에 무엇을 지을지부터 고민하는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원점에서 고민해야 할 때다. 청년 과학자, 예술가,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이 공간을 내어주자.

성수동 카페의 재창조 방식을 포함한 모든 활용 방법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즐거운 상상을 하자. 아파트 앞마당에서 과거의 원로과학자들과 현재의 연구원, 미래의 과학 꿈나무가 만나는 즐거운 판을 벌이자.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사진과 자료를 들고나와 들려주는 선배들의 무용담에서 미래 과학 꿈나무들이 자란다. 작은 실천이 나비효과가 되어 전체의 변화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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