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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38화. 카메라 없었다면 추억 어찌 남겼을까?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4-17 00:00
얼마 전 동창회 모임이 있었다. 다시금 동창들의 술잔이 무자비하게 난무했다. 그래서 또 술에 '목욕을 할' 정도로까지 만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별 탈이 없었던 것은 의리 돈독의 대전 사는 동창 친구가 다시금 집 앞까지 필자를 태워다 준 감사함의 우정 덕분이다.

평소 돈보다 우정(友情)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못 사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의 혼례를 앞두고 동창 외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린 바 있었다. 그중엔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귄 선배 둘도 포함되었다.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을 듯 각별한 우정을 쌓아왔다. 하지만 사람의 만남은 본디 회자정리(會者定離)인지라 같은 직장서 근무하다가 헤어진 지가 꽤 된다. 그럼에도 이따금 만나서 밥과 술을 나누곤 했다.



한데 아들의 결혼 사실을 문자와 카톡으로 전했는데도 당최 함흥차사였다. 그러던 중 와병(臥病)으로 말미암아 아예 전화기조차 꺼놓았던 선배로부터 아들의 결혼을 일주일 앞둔 밤에 전화가 왔다.

"아들 결혼한다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형, 건강은 어떠세요?" "여전히 일주일에 사흘은 통원치료 중이야……." 그렇게 아픈 몸임에도 전화를 주신 형이 정말 감사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에그, 전화 안 주셔도 되는데……." "내 몸이 말이 아니라서 결혼식장은 못 가니 은행 계좌번호 좀 문자로 찍어줘. 그리고 아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혼례 마치는 대로 제가 찾아뵙고 밥 살게요. 부디 건강하시고요!!"

반면 간담상조(肝膽相照)의 우정까지를 자랑했던 또 다른 선배로부터는 일언반구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그날 전화를 주신 선배는 필자처럼 가난하다. 그러나 연락이 없는 선배는 사업으로 꽤 돈을 번 부자다.

하지만 그 선배는 '무작정' 의리와 우정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서 만나는 스타일이다. 즉 이익이 되는 자만 좇는 그런 타입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독해(讀解)할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과연 어떤 빛깔로 드러날까.

큰일을 겪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라던 선배의 호언장담이 하지만 떨어진 목련꽃인 양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술을 좋아하다보니 이튿날엔 해장국을 자주 찾게 된다. 해장국의 지존은 뭐니뭐니 해도 복어해장국이다.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해서 고급 생선에 속하는 복어는 탕이나 찜, 그리고 회로도 미식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 맛이 오죽했으면 중국 북송 때의 시인이었던 소동파는 복어를 일컬어 '죽음과 맞바꿀 맛'이라고까지 극찬했을까.

그렇지만 복어의 치명적인 독에는 딱히 해독약조차 없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한 번 붕괴된 우정은 그 독한 복어의 독(毒)처럼 수습하기가 힘들다. 그처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걸로 보아 필자도 별 수 없이 나이를 꽤 먹었다는 느낌이 눅눅하다.

아무튼 그날도 동창회에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동창회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그러자니 문득 '만약에 카메라가 없었다면 추억을 어찌 남겼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나 졸업식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백일이나 돌 때의 사진은 두 말 할 나위조차 없다. 사진은 국적이나 언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기에 사진을 일컬어 '세계의 공통어'라고까지 하는 것이다. 카메라(Camera)의 명칭은 '아치 모양의 방(arched chamber)'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진, 즉 카메라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바로 사진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고 감상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발명가인 루이 다게르(1787~1851)의 공이 지대했다. 다게르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발명에도 소질을 보였다.

다게르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프레보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사진의 기초가 되는 실험은 이미 18세기에 이루어졌다. 독일의 천문학자인 요한 H. 슐츠(Johann H. Schultz)가 1727년에 질산은 용액이 빛을 보면 검게 변하는 현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한 1826년에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발명가인 조지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ephore Niepce)가 은으로 도금한 금속판에 아스팔트를 칠한 후 그 금속판을 카메라 옵스큐라의 벽면에 세워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워지지 않는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다게르는 1831년에 사진술을 한 단계 더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또한 소금 용액을 시용하면 분해되지 않은 요오도화은을 제거해 상을 고정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처럼 다게르의 사진술은 요오드화은, 수은 증기, 소금 용액 등을 거치면서 1839년에 완성될 수 있었다. 1839년은 다게르에게 다양한 명예가 주어진 해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주었다.

영국의 왕립학회와 미국의 전국디자인아카데미에서도 다게르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사진은 더욱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진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전쟁의 역할이 컸다.

크림 전쟁(1854~1856년)과 남북전쟁(1861~1865년)을 통해 종군기자들은 전쟁의 생생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독자들은 이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다게르 말고도 카메라를 발명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은 많다.

그러나 지면상 그들을 모두 끌어올 순 없고 해서 이만 마친다. 이어선 사진과 관련한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피력코자 한다. 동창회에서도 사진을 찍었지만 필자는 평소에도 사진 찍기를 즐긴다.

현재의 이 지면 '만약에' 시리즈 집필 외에도 필자는 아홉 군데의 언론과 기관 등의 매체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있다. 취재를 나갈 때는 주로 캐논카메라를 사용하는데 무거워서 가방을 지참해야 한다.

대신 스마트폰은 카메라의 화질이 훌륭할 뿐 아니라 소지하기도 편해서 참 좋다. 동창회가 있을 적마다 캐논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동창회 다음카페에 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네이버 밴드'와 '카카오톡'으로 시선이 옮겨가면서 덩달아 동창들의 관심도 김 빠진 맥주가 돼 버렸다.

하여 지금은 다음카페엔 아예 사진조차 올리지 않고 있다. 재작년 봄에 딸이 결혼식을 마쳤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딸과 사위가 선물을 사왔다. 그래서 집에 가득한 앨범 중에서 맘에 드는 사진을 골라가라고 했다.

지난 주 토요일에 예식을 치른 아들 역시 외국으로 허니문 여행을 떠났다. 아들과 며느리가 집으로 인사를 오면 딸에게 했던 것처럼 앨범을 가득 펼칠 요량이다. 지금도 사진이 그처럼 많은 까닭은 지난 시절 나의 직업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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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늙어봤니? 나는 젊어도 봤다! 30여년 전 전국 최연소 사업소장으로 근무할 당시, 필자의 20대 중반 사진이다.
언론사에 들어가기 전 S카메라에서 영업부장을 했다. 전국을 무대로 한 영업활동이었기에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여행까지 즐길 수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어떤 사진을 줄까... 하면서 떠들어본 앨범 중에서 눈에 콕 들어오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우선 재작년, 가족여행으로 갔던 부여 고란사에서 아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필자보다 키가 크고 늠름하기 이를 데 없어 항상 '믿음표'인 듬직한 아들이다. 또 하나는 36년 전인 지난 1984년 2월 1일에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받은 전국 최연소 사업소장 임용장이다.

당시 아들이 두 살이었고 필자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그처럼 승진이 빨랐던 것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열정과 판매실적의 두드러짐 덕분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짠한 느낌으로 다가온 사진 역시 사업소장 재직 당시의 사진이었다.

필자 이름의 명패를 두고 책상에서 근무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러자 문득 '그때가 진정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시절이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까지 뭉클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인 '화양연화'는 하지만 그 상황이 길지 않고 짧다는 게 유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의 결혼식 바로 하루 전날에도 야근을 한 때문이다. 경비원이란 직업은 남들 다 쉬는 토·일요일은 물론이요, 기타의 공휴일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 애로사항이다. 따라서 때론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경우도 있어 적이 당황스럽다.

예컨대 지인들의 관혼상제라든가 중요한 모임, 그리고 객원기자 등의 공모와 면접 등의 상황 발생이 바로 그 예(例)이다. 어쨌든 카메라가 있기에 나의 객원기자와 시민기자, 그리고 리포터와 시니어 기자 역할까지 하고 있음은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고로 카메라를 만들어 주신 분들에게 이 칼럼을 통해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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