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연의 산성이야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백제 성왕의 아픔이 남아

제42회 관산성 아래 구천(狗川)에서의 비극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8-04-20 00:00
6세기 무렵 신라는 빈번해진 백제와의 충돌에 상주(上州)를 사벌주에서 감문주(甘文州-김천 부근)로 옮기고 삼년산성을 중간거점으로 삼아 중엽에는 추풍령을 넘어 영동, 옥천 방면으로 진출, 육로와 수로를 확보하면서 서진에 박차를 가한다. 동시에 뒷날 사비 정벌의 루트로 양산(陽山)-금산(錦山) 방면을 개척하기 위해 힘을 썼다. 측근 김흠운 장군까지 보내어 양산 근처 조천성(助川城-대왕성?)에서 벌인 전투(655년)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라는 백제군의 보복 공격에 삼년산군주 무력의 비장인 도도(都刀)의 군사들과, 가야에서 귀화 단양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한주(漢州-경기도 廣州)에서 크게 활약한 김무력(金武力) 등을 동원하여 관산성 일대에서 백제에 맞섰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 정보에 익숙한 도도는 간첩들을 통해 야간에 사비로부터 온 성왕이 步騎 오십(오천?)의 말을 탄 군사와 함께 관산성의 여창(성왕의 아들)을 만나러 밤에 간다는 첩보에 따라 구천(狗川)에서 매복, 성왕을 사로잡아 죽인 다음 총공격하여 백제군을 대패시켰다(동구의 산성. 동구문화원, 2002 pp165-171).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과 4명의 좌평, 3만여 명의 병사를 잃은 채 여창은 군사 일부와 함께 겨우 탈출했다. 이때 성왕의 출발지를 노고성 밑 무중동(武中洞) 아니면 계현·성치 산성 방면이 아니었을까도 생각된다. 이후 위덕왕(여창) 무렵부터 꾸준히 많은 복수전들이 감행된다.

구진베루와
구진베루와 식장산 아래 무중동 일대/사진=조영연
<성왕 사지(聖王死址)>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현재의 삼성산성을 관산산성으로 보고 지역에 전해 오는 전설에 근거를 둔 구진베루설(역사 기록 속의 狗川)이다(신라,백제 격전지. 지표조사팀. 2003). 다른 하나는 성왕 피살의 장소를 노고성 동편 아래로 보는 설이다. 환산성을 관산성으로 보는 견해(정영호, 백제 고리산성고. 백제문화 7,8호 합집, 1975)를 중심으로 노고산성 북쪽 끝 신라군과 이백리 근처에 '구천'과 통할 수 있는 '갯골'이 있으며 증약들을 사이하고 이백리성과 노고성의 백제군들이 각기 주둔해 싸웠다는 전설에 바탕을 둔 증약 근처설이다(옥천향지. 관성동호회, 1984).



이들 중 구진베루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대전에서 옥천진입 길목 삼양검문소에서 서쪽 37번국도 옥천-금산방면으로 약 1km 정도에 말무덤고개가 있다. 고개 오른쪽 절벽 아래 깊고 유유히 굽이도는 내가 서화천 중 성전천이다. 말무덤고개 아래 S자형 낭떠러지 일대가 성왕의 죽음과 연관된다고 추정되는 구천(狗川) 즉 구진베루다. 이곳은 서쪽 식장산 기슭 무중동(武中洞-오동리)과 삼성산의 중간쯤으로 굽이도는 구진베루는 양쪽에서 교묘히 감춰져 보인다. 무중동과 삼성산은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중동은 노고성과 숯고개산성을 배후로 한 식장산밑의 마을로 백제군 주둔지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무중동
무중동/사진=조영연
성안
삼성, 서산, 삼양, 구진베루 일대/사진=조영연
삼성산 일대를 역사속 관산성(옥천성)이라고 본다면 무중동에서 여창이 들어가 신라땅 깊숙한 구타모라새 지점까지는 이미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방심하고 보기 오십을 대동하고 아들을 만나러 가던 성왕은 그 중간 지점인 구진베루에서 매복한 적군에 의해 불의의 습격으로 해를 입은 것이다. 도도는 이미 지형이나 성왕의 출동 등 백제측 동태를 간자를 통해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백제군은 첩보전에서 진 것이다. 육이오 전황을 반전시킨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연상시킨다. 무중동(노고성)-구진베루-구타모라새(관산성 근처)의 무대에서 발생한 급박한 사건으로 배신한 신라에 대한 백제는 보복은커녕 경국의 대반전을 초래했다.

삼성산과 서산 사이는 원래 낮은 고개였으나 현재는 상당히 낮춰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선철도, 경부국도, 고속도로 등 국토의 대동맥이 통과하는 대단히 중대한 교통요지다. 임진왜란, 최근의 6.25 전쟁마다 반드시 점령해야 한 곳이었다. 삼국시대도 미찬가지였기 때문에 삼성산성과 서산성을 양편에 축조해 방어에 이용했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조영연-산성필자250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