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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연의 산성이야기] 동학군 세성산 전투의 현장엔 갑오농민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제47회 세성산성(細城山城-천안시 성남면 화성리)과 천안삼거리 흥타령

입력 2018-06-01 00:00   수정 2018-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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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성산성 남문지에서 본 성안 모습/사진=조영연
천안삼거리는 한양에서 내려와 삼남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교통 요지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근에 신은(新恩), 금제(金蹄)라는 큰 역들이 설치됐고 주변에 원들이 자리했다. 산성 북벽 바로 밖이자 21번국도와 병천천변 연춘리의 연춘교는 과거 영춘역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성산성 아랫마을에 공달원(孔達院)이 설치돼 있었다. 과거 삼남으로 통하던 길은 성의 서쪽 소정리를 거쳐 전의 운주산성 아래로 가거나 혹은 세성산성의 바로 우측 수신을 거쳐 조치원으로 내려갔을 것이고 진천, 청주, 경상도 방면 왕래는 현재 21번국도 근처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세성산 북쪽 정상에서는 천안시내 방면과 멀리 위례산(성), 만노산(성)까지도 조망된다. 북쪽 진천방면 길 즉 21번국도와 좌측으로는 경부 방면 교통로가 보인다.

세성산은 불과 해발 200미터 조금 넘는 야산이지만 주변이 워낙 낮은 지대라서 제법 높아 보이며 특히 급경사인 북벽 아래 도로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성의 남서쪽은 마을까지 비스듬히 낮아진다. 정상 장수바위를 정점으로 하는 좌우 두 줄기가 마치 기슭을 포옹하듯이 감싸 동서벽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마을 근처에 이르러 안으로 굽으면서 남벽을 형성, 계곡을 감싼다. 남벽 중앙부에 약 20m 가량 절단된 부분이 수구와 함께 마을로 통하는 남문지다. 따라서 성의 내부(현지명 성안말)는 북고남저의 삼태기 안처럼 아늑한 원형 마을이다.

산성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약 280m 가량 동서 타원형의 내성이 있고, 내성의 우에서 양쪽으로 포옹하듯 내려온 줄기들이 외성의 동서벽을 형성한다. 북벽은 자연스럽게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천연성벽을 이뤘고 산의 8부 정도를 가로지른 내성벽은 붕괴부에서 토석혼축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장 경사가 덜한 서벽에는 거친 자연석 막돌로 석축을 했던 듯한데 그 붕괴석으로 보이는 석재 일부는 황씨묘의 축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 내부에서는 지금도 붉은색 기와편과 경질토기 등 토기와 자기편들이 산재해 삼국 이래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활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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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성선성에 있는 동학군 위령비/사진=조영연
남문을 들어서면 세성산 정상 아래로 양지바른 원형(圓形)의 성안마을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중앙에 세성사와 우측으로 동학군 위령비가 눈에 들어오고 군데군데 한씨와 황씨 집안의 민묘들이 산재했다. 세성사 앞에 지금도 사용되는 옛 우물과 절 후면 골짜기에는 축축이 젖은 또 다른 우물터와 도랑이 있다. 내성벽 바로 밑 공촌신당(孔村神堂)이 세워져 매년 정월 마을 안녕을 기원하고 여기서 죽은 동학군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동학군 위령비는 죽창을 의미하는 화살촉 모양의 흰 색 조각품, 구름모양 비석 머리와 진회색 몸체에 바탕돌이 인내천 사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구한말 동학운동 시 북상과정 중 집결했던 농민군들 수백명이 죽산부사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대패하여 피비린내 나는 모습이 몹시 참혹했었다고 당시 참여했던 조부로부터 들은 사실을 보살님은 전해 준다. 성안말 홀로 남은 세성사 아늑하고 고요한 마당가 옛 우물은 술을 빚으면 하룻저녁에 술이 된다는 영험을 지녔다 한다.

남매 장수를 둔 어머니가 축성 경쟁을 벌려 딸을 죽이고 아들을 살렸다는 흔하고 흔한 산성설화는 이곳에도 남았다. 다만 죽은 누이가 흰 용마가 돼 승천했다가 훗날 장수가 된 아들이 나라를 위해 필요한 준마를 모집함에 어떤 말도 오르지 못한 절벽을 뛰어올라 함께 나라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부분만이 독특하다. 장수와 말의 발자국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성의 정상 장수바위에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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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성산성 내부 모습/사진=조영연
성밖 마을 공달원지에는 지금도 느티나무 두 그루가 옛날을 말하는 듯 우람히 서 있다. 이 공달원터는 천안 삼거리와는 그리 멀지 않다. 천안삼거리는 한양에서 내려와 삼남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교통 요지였기 때문에 그 길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나그네들이 이 공달원에서도 쉬어갔을 것이다. 가까이는 호서에서, 멀리 호남과 경상도에서 사람들과 온갖 물자들을 싣고 가던 마차꾼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거쳐 오르내렸다. 말을 매고 지친 몸을 쉬어 가던 원이나 주막 근처 시냇가에는 축축 늘어진 능수버들이 그들의 땀을 식혀 주었다. 주막에는 늘 이별과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길가 주막에서 목을 축이다 보니 어느덧 노랫가락이 흥겨운 타령으로 변했다. 한양에서 돈을 번 이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안고 집에 들어갈 즐거움에서, 과거급제 청운의 꿈을 이룬 이는 금의환향에 들떠 콧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떨어져 낙담한 이나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은 허탈한 마음을 잊으려고 탁주 한 사발에 눈물을 안주 삼아 들이켰을 것이다. 이래저래 한 잔 두 잔 들이킨 술이 거나해져 푸념이나 자랑은 타령이 되어 질펀히 젖었고 그것이 오늘날 천안삼거리 흥타령으로 남았다.

천안삼거리에는 수자리 살러 가던 아비가 홀로 남은 외동딸과 헤어지면서 버들가지를 심은 것이 크게 자란 뒤에야 돌아와 상봉했다는 등의 설화도 있으나 아무래도 이런 곳에 어울리는 것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과거 보러 가던 전라도 고부의 한 선비가 주막에서 하룻밤 머물다 깊은 밤 기생 능소의 청아한 가야금 소리에 반해 사랑을 맺었다. 과거에 급제한 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선비를 잊지 못한 능소가 기다림에 지쳐 죽고 그 자리에 자라 버들이 됐다는 애틋하고 비극적인 전설이다.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제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아이고대고 성화가 났구나.

은하 작교가 무너졌으니 건너갈 길이 막연하구나"

물론 중간중간 조흥구들로 구성지게 간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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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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