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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화가 나서 빡칠 땐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18-11-14 09:41

신문게재 2018-11-15 22면

황산벌
"야…야…야… 에이 씨발." 친구는 거리를 걸으면서 종종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서른을 맞은 해에 어느날 친구와 난 광주비엔날레를 보러 광주에 갔다. 전시회를 보고 광주 시내를 걸으며 친구는 담배를 입에 물고 앞에 가는 사람에게 하듯 또 욕을 했다. 난 움찔해서 친구 팔을 잡았다. 아이를 손에 잡고 걷던 남자가 '뭐야?'라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 와, 세상 좋아졌다. 여자가 대놓고 길에서 담밸 피우네." 그 남자는 열을 올리며 친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친구는 시큰둥하며 피식 웃기만 했다. 당시 친구는 오랫동안 방황의 늪에서 헤매던 중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심사가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그런 마음의 갈등을 친구는 허공에 대고 욕을 날려 풀었던 것 같다.

젖내 풍기는 아기가 하는 욕을 들어봤는가. 내년이면 서른살이 되는 내 조카는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기였을 때 욕을 해서 식구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밖에 나가 동네 형아들하고 놀다보니 욕을 배운 것이다. 조카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입만 열면 "씨이바알!", 아주 찰지게 욕을 구사했다. 우리는 황당하기도 하고 우스웠다. 뽀얗고 오동통한 아기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게 쇼킹했지만 귀여워서 나는 조카의 욕을 은근히 부추겼다.

푸코는 "나의 사고방식, 나의 행동방식, 나의 정서구조, 이 모든 것들이 한편으로는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분노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우리 계층이, 혹은 어떤 집단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거나 뜻이 좌절됐을 때 분노한다. 그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거나 파괴적인 결말을 맞는다. 끔찍한 파국을 방지하는 방법 중에 욕처럼 요긴한 건 없다. 욕을 한번 오지게 내뱉어 봐라. 닷새 묵은 똥이 쑥 빠져나간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맛볼 것이다. 국문학자 김열규도 "욕은 묵은 체증도 쉽게 내리게 하는 약"이라고 극찬했다. 화를 참으면 화병이 생기거나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가 큰 묻지마 살인이나 자살은 분노를 표출하지 못해 발생하는 범죄의 한 형태다.



내가 재밌게 본 영화 넘버 원은 '황산벌'이다. 영화의 백미는 백제와 신라 병사들의 욕 배틀이다. "껍디를 확 벳기가꼬 똥구녕에 확 찡가뿔라 씨부랄", "뭘 꼬라봐 이 씨발놈들아, 눈깔을 뽑아서 당나구 좆대가리를 쑤셔 박아 버릴게 이 씨발놈들아. 씨벌 씨벌"…. 양쪽 병사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욕은 그야말로 언어의 성찬이다. 핏대를 세우며 내뱉는 신랄한 욕설이 전혀 역겹지 않다. 성적 표현이 난무하는 욕임에도 해학적이어서 배꼽 빠지게 한바탕 웃어제끼기만 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염병하네.' 국정농단의 주인공 최순실이 법정에 들어가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소리칠 때 청소노동자 아주머니의 촌철살인같은 욕 말이다. 그때 국민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사이다 맛을 봤다.

얼마 전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 밥먹고 차 마시며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 중에는 남편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선배, 요즘 남편이 갱년긴지 자기 인생 찾겠다고 그러는데 빡치더라니까." 과연 후배가 빡칠 만 했다. 남편 욕 실컷 쏟아낸 후배는 집에 갈 때 아마 다음날 아침 남편 술국으로 끓여줄 북어를 사갔을 지 모른다. 요즘 세상, 욕할 일이 참 많다. 무능한 정치인, 최소한의 윤리도 모르는 기업인, 아이들을 볼모로 정부의 눈 먼 돈을 마구 처먹은 사립유치원 원장, 약자를 개 똥으로 알고 깔아뭉개는 양진호들. 욕 먹을 만한 인간에게 하는 욕은 합리적인 욕이다. 욕이 하고 싶은데 당사자에게 차마 욕할 수 없다면 나에게 대신 하라. 내 기꺼이 당신들의 욕받이가 돼 주마.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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