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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세기의 대결, 리스트와 파가니니

진정한 비르투오소 모습 아쉬워

한윤창 기자

한윤창 기자

  • 승인 2018-12-13 07:54
2018 오지희 반명함 사진
19세기 초 중반 서구 클래식음악계는 대중과 함께하는 독주회 수가 늘면서 연주자들이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 또한 광범위하게 증대됨에 따라 피아노제작과 악보산업은 호황을 맞이했다.

1840년경 7옥타브에 음량이 확대된 오늘날 악기와 가장 유사한 피아노가 등장했고 그에 걸맞은 고도로 기교적인 연주법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수가 아닌 대규모 관객 앞에 당당히 선 악기의 왕 피아노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오페라, 교향곡의 흥미로운 선율을 피아노로 편곡하거나 바이올린 곡을 피아노로 바꾸고, 성악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등 기교와 엔터테인먼트로 관객의 흥미를 끄는 음악회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그 중심에 리스트와 파가니니가 있다.

리스트와 파가니니는 대표적인 비르투오소 연주자다. 거장을 뜻하며 덕(virtue)이 있다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비르투오소(virtuoso)는 관객과 직접 소통을 넘어 자신의 장인적 기교를 과시하고 인기를 얻기 위한 흥행가적 성격을 띠었다. 파가니니(1782~1840)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을 몰고 다닐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연주력으로 유명했다.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온갖 주법을 개발하며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벤트성 연주를 했던 이 비르투오소는 당대보다 오히려 후대에 미친 영향력으로 조망해야 한다. 이자이, 요아힘, 크라이슬러 등 비르투오소 계보를 잇는 바이올리니스트 선두에 파가니니가 서있다.



리스트(1811~66)는 파가니니 음악에 압도돼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고 싶었다. 당시 음악문화에서 리스트가 유일한 비르투오소는 아니었다. 탈베르크, 드레이쇼크 같은 비르투오소들도 리스트와 승부를 겨뤘다. 하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자유자재로 즉흥연주를 해내는 탁월한 기량으로 독보적인 인기를 끈 리스트는 최초로 리사이틀 개념을 창안하고 모든 곡을 암보로 연주해 범접할 수 없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군림했다. 파가니니와 리스트는 단순히 기교만 부리는 연주자가 아닌 초인적인 연주실력을 지닌 그 자체로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한편 오늘날 대부분 클래식공연은 이러한 비르투오소 연주와 거리를 둔다. 흥행성 짙은 요란한 무대에 싫증난 19세기 일부 예술가들이 작곡가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아티스트 위주의 음악회를 열었다. 통상 연주회장에서 진지하게 감상하는 분위기는 비르투오소와 또 다른 계보의 전통으로 현재도 클래식음악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11월 25일 대전예당에서 세기의 대결이란 제목으로 열린 리스트와 파가니니 음악회는 관객의 호기심 속에 연주하기 쉽지 않은 두 거장의 작품을 교대로 들을 수 있는 음악적 사건이었다. 리스트와 파가니니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클래식 애호가들의 관심을 자아내는 마케팅이었는데, 피아니스트 다비드 알라다쉬빌리와 바이올리니스트 필립 포가디 연주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속담을 떠올리게 했다.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깊을 수밖에 없다.

피아니스트는 강력한 타건에 기반한 놀라운 손가락 움직임을 보였는데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만 질주하는 바람에 정확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서정적 표현력을 갖추고 충분히 감흥도 불러일으켰지만, 무리하게 기교를 추구하니 음악적 역량이 감당하지 못했다. 물론 이 정도 기교를 갖추고 연주하면 나름 비르투오소 연주자라고 볼 수 있다. 대곡을 다루는 그들의 현란한 연주에 관객도 열띤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두 거장의 이름을 걸고 대전예당 무대에 오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기교가 뛰어나다고 음악적인 정교함을 무시해서는 진정한 비르투오소라고 할 수 없다. 리스트와 파가니니가 역사에 남은 것은 음악성과 절대기교를 함께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이 흥미롭게 반응했지만, 그날 비르투오소 연주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오지희(음악평론가, 백석문화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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