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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藥과 惡

입력 2019-05-20 09:17   수정 2019-05-20 09:17
신문게재 2019-05-21 22면

#1. '약 빨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신문편집에 대한 이야기다. 기발하면서도 통찰력있는 제목을 지은 사람에게 따라오는 표현이다. 노인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정부가 정작 노인에게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는 기사에 한 편집기자는 'You don't 老'라는 제목을 달았다. 또 다른 편집기자는 반려동물을 여름휴가 숙박업소에 동반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기사를 '집 떠나면 개가 고생'이라는 말로 함축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 편집을 잘 하는 약이라도 따로 있는 것처럼, 잘하는 사람은 늘 잘했다. 그들은 '이달의 편집상'을 종종 받으며 실력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무릎을 탁 칠 제목이라는 게 있었다. 잘하는 사람의 지면이 부러웠다. 그렇게 잘 할 수 있다면. 편집을 잘하는 약이라는 게 있다면 먹고 싶었다.

#2. 한국인에게 마약은 두려운 불법이면서도 긍정의 판타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대중에 사랑받던 어느 연예인은 창작의 고통을 견디느라 그랬다며 예술로 죄를 희석하려 했다. 어떤 부잣집 자녀는 해외 유학생활에서 접했다며 돈 냄새를 뿌렸다. 마약은 그렇게 예술과 부에 가깝다면 따라올 수도 있다는, 여유로운 사치의 이미지를 입게 됐다.

네티즌들은 온라인에서 재미있는 콘텐츠를 보면서 '나라가 허락한 마약'이라고 농담을 한다. 어떤 기업은 피부의 잡티를 감쪽같이 가려준다며 '마약쿠션'이라는 쿠션타입 메이크업 제품을 판다. 세상 편안한 휴식을 준다는 베개, 방석, 패드도 마약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돈을 번다. 서울 광장시장에는 마약김밥도 있지 않던가. 최근 마약 투약 혐의로 검거된 황하나씨도 소셜미디어에 마약김치라는 태그를 한 게시물을 올려 논란이 됐다. 자극적인 표현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과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잘 나가는 소비재를 팔고 싶은 꿈이 교차하는 단어. '마약'은 그렇게 우리의 입에서 나가 세상을 떠돌았다.

#3. 벤 포스터 주연의 영화 '챔피언 프로그램'은 고환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달성했던 랜스 암스트롱의 도핑을 다룬 작품이다. 많은 이가 인간승리라며 열광했던 사이클 황제는 도핑의 결정체였다. 암스트롱의 단점은 피에 있었다. 자전거는 잘 탔지만 오르막을 쉽게 오르기엔 혈액 속 산소량이 다른 선수보다 적었다. 선천적인 부족함을 그는 약으로 메웠다. 적혈구를 늘려 산소 운반 능력을 증가시키는 금지약물 EPO를 맞아 기록을 세웠다. 고환암을 이겨내고 유명한 선수가 돼 암 환자를 위한 재단을 세운 건 그가 맞다. 투르 드 프랑스 7연패의 대기록을 세운 건 그가 한 일이 아니다. 약이 한 일이다. 그는 결국 도핑이 들통 난 뒤 타이틀을 뺏기고 사이클계에서 영구 제명된다.

약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정의는 '병이나 상처 따위를 고치거나 예방하기 위해 먹거나 바르거나 주사하는 물질'이다. 다섯 번째 정의로 '마약, 아편, 술 따위를 빗대어 이르는 말'이 나온다. 어딘가 약한 사람이 약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마약을 수식어로 삼지 않아도 좋은 물건은 잘 팔리기 마련이다. 마약 같다고 말해야만 그 콘텐츠의 재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마약을 재밌는 표현으로 여기고 웃는 건 중독과 파멸로 이어지는 진짜 마약의 해로움을 희석시키는 악(惡)한 일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는 이유로 도핑을 하는 것도, 세상만사 잊자고 필로폰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력이든 마음이든 뭔가 부족한 사람만이 마약을 찾는다. 편집에 대해 '약 빨았다'는 감탄. 그 역시 노력보다 핑계 대기가 쉬웠던, 약한 사람의 악한 마음이었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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