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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대체 두 분 어떤 사이인가요

주혜진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입력 2019-05-20 09:14   수정 2019-05-22 12:08
신문게재 2019-05-23 22면

주혜진_증명사진
주혜진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저녁 약속을 했다. 그녀들을 만나기 전 준비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우선 푹 퍼질러 앉아 오래도록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서 음식물을 흘려도 감쪽같은 편안한 의상(할머니는 이런 종류의 의상을 그냥 '몸뻬'로 퉁쳐 부르셨다)과 역시 오래도록 먹을 수 있는 빈 위장, 그리고 딴생각 한 보따리다. 고춧가루 낀 이를 환히 드러내고 웃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편안하고 좋은 친구들이지만, 한 자리에서 수다 제3부가 시작될 땐 딴생각이 요긴하다. "누가 보고 있지 않으면 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이야기가 사극과 막장, 시트콤으로 버무려져 정말 오래도록 펼쳐지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눈 떠보니 같이 살고 있는 가족, 누가 등 떠민 거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원해서 만든 가족에 대한 서운함 끝에 그녀들은 꼭 이렇게 얘기한다, "가족이라는데 남보다 못한 거 같아. 아니다, 그래도 남보다 나으려나?"

'가족'과 '남'사이의 경계가 핏줄이나 서약 혹은 서류로 뚜렷하게 나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발랄하고 따뜻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육상효 감독의 최근작 '나의 특별한 형제'는 누구든 쉽게 대답할 수 있지만, 또한 누구든 그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나의 가족인가.'

똑똑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머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세하와 튼튼한 몸을 가졌지만, 그 몸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머리를 가지지 못한 동구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관계에 있다. 물리적 결핍뿐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감정의 결핍도 채우는 이 두 사람 앞에 사람들은 늘 '관계의 이름'을 묻는다.

"대체 두 분 어떤 사이인가요?" 동네 주민센터나 은행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물어올 때 그들은 '가족'이라 답할 수 없었지만, 누구든 쉽게 떠올리는 가장 가족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새벽 세 시에 알람이 울리면 동구는 누워 있는 세하의 자세를 바꿔주고, 컵 사이즈에 맞춰 빨대 길이를 조절해 준다. 도장을 찾지 못하는 동구를 위해 세하는 몇 번이고 쉽게, 숨을 고르며 도장의 생김새를 설명하기도 하고, 수영하고 싶어 벽에 머리를 찧는 동구의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다.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 너무나도 맛있으니까, 내 입으로 먼저 넣을 땐 눈을 흘기기도 하지만, 결승점에 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열심히 팔을 저어 기어코 완주한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세하와 동구는 같이 있으면 신나고 좋은 사람이고, 내가 없으면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사람이고, 날 위해 길이가 다른 빨대 수십 개를 가방에 챙겨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함께 있고 싶은, 진짜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피가 얼마나 진하게 섞였는가, 어떤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가로 내 가족이 누구인지 뻔하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내게 어떤 사람인지 묻는 것이 필요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연인이 아니어도, 남녀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물음과 바람을 담은 이 영화와 달리 우리 시대는 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관계'에 매우 인색하다. 연말정산 서류에서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피 한 방울은 섞인 누군가여야 한다. 다급한 응급실에서 수술동의서에 사인할 수 있는 사람도 '공인된' 누군가여야 한다. 돌봄, 휴가, 수당 등 각종 가족지원제도는 사회가 인정한 가족 구성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있다. 혼자 사는 사람이 엄연한 '가구'로 이름 붙여져 현시대의 '대세 가구'가 된 지금, 과연 누가 가족인지, 누가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젓가락질할 수는 없지만, 라면은 너무 먹고 싶은 내 마음 알고, 뜨거운 면을 후후 불어 내 입에 넣어줄 사람이 있다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해도 우린 함께 있어야 한다. 주혜진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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