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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먹성도 부전여전

입력 2019-06-26 10:15   수정 2019-06-26 10:33
신문게재 2019-06-2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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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해남 미황사를 병풍처럼 두른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가 안개로 뿌옜다. 땀으로 범벅된 몸으로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 8시부터 가파른 산을 오른 탓에 위장에선 아우성 소리가 요란했다. 배낭에서 바게트 빵을 꺼내 정신없이 먹었다. 물기도 없고 질겨서 목이 막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물도 아껴 먹어야 한다. 전날 김밥을 사놓자니 상할 것 같고 새벽 일찍 문 여는 곳이 없어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바게트를 샀다. 양도 많을 뿐더러 달지 않아 물이 덜 먹힐 것 같아서였다. 먹을 건 바게트 한 봉지와 물, 오이, 참외 하나 뿐. 배낭이 무거우면 등산하는데 힘들기 때문이다. 오이도 뚝 잘라 먹었다.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위독해서 앰뷸런스로 대전 병원으로 가는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직후였다. 그런데도 난 미친 듯이 먹어대며 내 위장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니!

데이비드 흄은 감정은 이성을 앞선다고 했다. 당연히 감정보다 앞서는 건 본능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아무리 잘난 척 해도 동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데 나 살기 급급해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아버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냥 멍했다. 통곡해도 시원찮을 판에 달디 단 참외를 맛있게 먹고, 새콤한 멍가 열매도 따먹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나 자신이 부조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정녕 죽음은 개인의 몫인가. 가족의 첫 죽음인 큰언니 때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 끼니 때마다 국에 밥말아 배불리 먹었다. 당시 '이건 뭘까'라고 생각하며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비로소 죽은 이의 부재를 실감하며 상실감에 시달렸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까탈스런 성격과 뭐든 잘먹는 먹성이 그렇다. 나이 50을 훌쩍 넘은 요즘은 자주 아버지를 거론하게 된다. "아버지 체질을 닮았나봐요.", "아버지가 잘 드시는 데도 살이 안 찌시거든요." 주말에 어쩌다 청양 집에 가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 배고파. 엄마 밥 언제 먹어?"라며 수선을 떤다. 그러면 엄마는 "넌 맨날 배고프다고 하니"라며 혀를 끌끌 찬다. 한번은 명절 때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돼서 접시에 명태전, 가지전, 동그랑땡 등 부침개를 접시에 담아 거실로 갔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쩝쩝거리며 먹는데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한마디 했다. "넌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니?" 회사에서도 일하다 배가 고파지면 먹는 상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두툼한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으면 기가 막힌데, 초코파이는 언제 먹어도 살살 녹아, 저녁에 매콤새콤한 비빔국수나 해 먹을까?

철없던 시절, 난 아버지를 죽어라 미워했다. 반항적이고 예민한 사춘기 땐 무조건 아버지가 싫어 밥상 앞에서 고개를 외로 꼬고 먹었다. 몇 년 키우던 개를 팔고 뒤꼍에서 몰래 우는 아버지를 봤을 때도 단지 나약한 인간같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상흔은 아버지의 깨지기 쉬운 영혼을 오랜 세월 괴롭혔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객지생활한다는 핑계로 무심한 딸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가끔 집에 갈 때 빵이나 과자 정도로 생색낼 뿐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셨다. 대신 밥 잘 드시고 떡, 빵 등 주전부리를 좋아했다. 언젠가 유성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사 간 찹쌀도넛을 아버지는 맛있게 드셨다. 진작에 맛난 것 자주 사다드릴 걸, 풍수지탄이다. 아침밥 잘 드시고 돌아가신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그나저나 아버지 기일 제사상에 당신이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자면 상다리가 휘어질텐데 어쩌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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