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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괜찮아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9-08-15 22:47
남상선 수필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살며시 왔다 가는 가을이라더니 바바리 깃을 세우고 낙엽을 밟는 발길에 그 실감이 왔다.

 

이 산 저 산 할 것 없이 별난 차림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연의 칠보단장 (七寶丹粧) 은 스펙트럼의 조화에서 오는 단풍의 아름다움이었을까!

 

천하 유명 화백의 어떤 배색이라도 천연 조화의 이 아름다움을 당해낼 수 있으랴!

 

오늘 따라 이유도 없이 울적한 마음에 인터넷 내 블로그의 사진을 뒤져 보았다. 거기엔 진주홍물이 흘러내릴 듯한 동학사 계곡의 단풍이 십 년을 뒤로 한 세월의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또 그 한 편엔 빨간 단풍의 분신이 돼 있던 내 반쪽의 그림자가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상 제일 먼 데 있는 아련한 모습이지만 머리를 쳐든 얼룩진 마음은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문 일은 마음을 달래려고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송림 오솔길에 발길을 맡겼다  

 

자주 걷던 한적한 길을 따라 배재대 뒤 도솔산 정상까지 갔다가 쉬엄쉬엄 걸어 내려온 것이 월평공원 인가(人家) 근처 산기슭까지 왔다.

 

눈앞에 웬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지명(知命) 안팎으로 보이는 부인에게 부축을 받아 걷고 있었다. 힘겨운 모습으로 쉬고 있기에 나도 곁에 따라 앉았다. 인사로 말문을 튼 후 세상사는 푸념 같은 얘기 끝에 두 분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고부간 (姑婦間)[이라 했다.

 

할머니께서 곁에 있는 며느리 자랑을 시작하셨다. 당신께서는 30대 청상과부로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순(耳順)이 되면서부터는 허리와 무릎 관절에 문제가 생겨 자유로운 거동이 안 됐다고 하셨다. 곁에 있는 착한 며느리가 당신의 손발이 되다시피 살아왔다며 한숨을 쉬셨다. 말씀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에는 곁에 있는 며느리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뻐서인지 며느리 손을 꼭 잡고 놓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듣고만 있던 며느리가 입을 열었다. 자신은 가슴이 따뜻하고 자상한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 덕분에 지금까지 마음 편하게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남편은 대학교수인데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늘 푸근한 마음으로 대해주어 감사하며 사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솔깃하게 듣는 내 모습에 위안이 되었던지 며느리는 신이 난 듯이 최근에 있었던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칠 전엔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당신 병 수발 드느라 고생한다며 나가서 단풍 구경이라도 하고 오라셨다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너무 간절한 시어머니 말씀이어서 며느리는 집안 청소나 마치고 바람 쐬러 나갈 생각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아내는, 구실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청소를 마치려고 부랴부랴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며느리의  동작은 기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서재 앞  남편 테이블만 손을  대면 청소는 다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아내는 그만 일을 저질렀다. 바삐 서둘다보니 테이블 위에 있는 남편 박사학위논문 원고에 커피 잔을 엎은 것이었다.

 

남편이 집필하며 마시던 커피가 잔에 남아 있었던 것을 모르고 서둘다가 박사학위 논문 완성본에 커피 잔을 엎은 것이었다. 2년 동안 공들인 박사학위 논문에 엎어진 커피 잔의 얼룩을 보고 아내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때 마침 연구실서 돌아온 남편이 그걸 보고 빙긋이 웃으며 아내 뒤로 가서 아내를 살며시 꼬옥 안으며 한 마디 하는 말이,

 

 괜찮아

 

이 한 마디였다. 순간 아내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황홀했다. 그 한 마디에 아내는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값진 액체가 진주이슬이 되어 그 선하고 평화로운 여인의 얼굴을 수놓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도 어떤 서운함도 원망도 아닌, 행복감의 결정체 진주이슬이었다. 그건 오로지 남편의 따뜻한 관용과 배려와 사랑이, 요술로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이슬이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장시간 심혈을 기울여 써놓은 박사학위 논문에 찻잔을 엎었다면 소리를 지른다든지 화를 낼 법도 한데 이 남편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하늘에 별난 주문이라도 해서 특별히 하늘에서 내려 보낸 사람 같았다.

 

아내의 눈물은 남편의 사랑과 관용에서 오는 감동만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남편에게 더 잘 해주고 정성과 사랑을 쏟아야겠다는 다짐을 바로 보낸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눈물은 보통 슬플 때 흘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내의 얼굴에 구르는, 그 진주 이슬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행복감이 새어나오는 즐거움의 표현이었다. 아니, 행복감과 즐거움의 극치에서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의 결정체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로 그 미담의 주인공은 천연기념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는 수수한 차림의 옷을 입었다. 보통 여인이 입었다면 그저 그런 옷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마음씨에 관용과 배려심을 가진 남자의 짝이어서 그런지 덩달아 모든 게 좋아만 보였다. 시어머니를 부축하고 산기슭까지 올라온 그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나친 편견이나 편애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상적 안목을 가지지 못한 보통사람의 생각이라서 그러했을까!

 

 ‘괜찮아

   

이 한 마디는 몇 번을 되뇌어보아도 백만 불짜리 관용과 배려와 사랑임에 틀림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이런 마음씨의 주인공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며느리의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남편의 아내에 대한 관용과 배려와 사랑하는 마음도방부제 처리하여 세세만년 (歲歲萬年) 걸어두었으면 좋겠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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