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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기] 극단주의를 넘어서는 길

입력 2019-10-10 10:56   수정 2019-10-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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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유낙준 의장주교
요즘 어떤 사회정치적 이슈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가 싸우는 것은 이념 간 갈등인가? 아니면 노인세대와 젊은 세대의 세대 간 갈등인가? 아니면 먹잇감을 놓고 싸우는 이익집단 간 갈등인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갈등하는 상황을 보고 자라나는 세대들은 무슨 희망을 갖게 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 우리는 갈등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살 수는 없는 나라인가? 라는 슬픈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극단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이나 행동이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는 주장이나 행동을 일컫는다. 즉 극단주의는 어떤 문제를 마치 모든 것처럼 지나치게 과도하게 보는 것이고 그에 따라 과도하게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행동하면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 일각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행동을 하는 극단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 즉 신중한 사람, 혹은 내성적이거나 소심한 사람, 결정하는 데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은 숨 막히는 삶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한 식구이고 서로 관계를 맺고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데도 서로 갈등하는 자리,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슬픈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슬픈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디 없을까?

코카콜라 음료를 좋아하기에, 코카콜라를 선택하면서 음료수는 오직 코카콜라가 최고라고 절대화시키며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고 적대시하는 것이 극단주의의 한 예다. 나는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너는 펩시콜라를 마시니 나는 너를 무너뜨리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이는 극단주의다. 극단주의는 오직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여기는 제국주의 질서와 맞닿아있고 그것이 서구가 지배한 근대주의적 삶의 방식이다. 한국사회는 역시 근대국가다. 아직도 진리는 자신이 믿는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인 듯하다. 나만이 진리가 아니고 너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탈근대적 개방성이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육체의 근육질을 키우기 위해서만 사는 물질주의자처럼 우리는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만이 오직 따라가야 할 진리라는 듯이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다. 로마제국만이 진리라고 선포하며 사람들을 지배하던 시대에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당시 사회의 극단주의를 넘어서는 길임을 느낀다. 자신의 인정하고 경험하는 한 문화와 질서만을 허용하고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배척하는 극단주의를 넘어서는 길이 곧 예수의 길이었다. 예수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살아있는 영혼의 삶, 즉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의 왕국을 제안한다. 보이는 육체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우리를 지배하게 허락하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극단주의가 야기하는 온갖 갈등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 안에서 극단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본다./대한성공회 유낙준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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