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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발가락의 백래쉬(backlash)

김명주 충남대 교수

입력 2019-12-09 10:49   수정 2019-12-09 10:49
신문게재 2019-12-10 22면

김명주-충남대-교수
김명주 충남대 교수
난 비교적 몸이 건강한 편이다. 적어도 저질 체력은 아니다.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 덕에 타고난 체력도 있고, 딱히 부유하진 않아도 어릴 때부터 배곯은 적 없이 잘 먹은 덕이다. 젖을 주면 젖대로 다 먹고, 우유를 주면 우유 한 통 뚝딱, 이유기에 어쩌다 소고기죽을 쑤어주면 아기가 다리까지 건덩거리면서 신나게 먹어치웠다니 과연 먹성은 좋은 편이다. 성장기를 지나 20대 전반까지도 뛰어난 먹성은 변함없었다. 먹성도 좋지만, 몸 움지럭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밖으로 나돌았고, 보문산을 뛰어 오르내리는 것이 나의 놀이였다. 중학교 시절 복도와 계단을 걸어서 다녀본 적이 거의 없다. 수업시간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갈 때엔 아무도 없는 복도 발판을 딛고 날듯이 튀어 오르면서 달렸다. 힘겨웠던 유학시절에도 남들은 체력이 딸린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머리가 딸리면 딸렸지, 체력은 버틸만했다.

그러더니 50대 초반부터 자주 체하고 소화기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추운 겨울 모자를 쓰지 않고 운동하러 나갔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데 영문도 모른 체 수년전 배워둔 단전호흡으로 간신히 압력을 조절해서 위기를 넘겼다. 다음날 늘 하던 대로 뜨거운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머리 한가득한 통증이 신기하게 사라짐을 발견하고, 전날의 머리통증이 추위로 인한 뇌혈관 축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매우 무지하다. 나도 그렇다. 몸의 물질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몇 년 전 발가락에 생긴 무좀이다. 평생 동안 발에 대한 방심의 결과였다. 왼쪽 새끼발가락이 자꾸 간질거려서 보니, 겉 피부가 헐어있었다. 처음엔 그것이 무좀인지도 몰랐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증상이 나타난 부위까지도 전형적인 무좀이었다. 그마나 얼굴과 손은 관리하면서도 발에는 철저하게 무심했었다. 발가락은 내게 복수한 것이다. "너 평생 발가락이라고 날 무시했어? 네가 건강하다고? 네 건강이 누구 덕인데. 어디 한번 당해봐." 발가락의 백래쉬(backlash)였다. 나름 잘 관리해줘도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재발한다. 평생의 무시에 대한 발가락의 백래시는 그토록 가차없다.

사실 발가락도 '나'다. 뇌나 위장이 '나'인 것처럼 발가락도 '나'다. 물론 굳이 중요성으로 따지자면 뇌가 더 중요하긴 하다. 뇌가 망가지면 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손을 사용하게 되고, 특히 언어를 정교하게 사용하게 되면서, 손과 언어의 원활한 사용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뇌의 기능이 기민해져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7만년 전 인간의 뉴런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소위 "인지혁명"은 인간의 손/언어사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뇌가 먼저가 아니라 몸의 활동이 먼저이고, 몸의 활동을 조절하기 위해서 뇌가 나중에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먼저'와 '나중'이라는 시차로 중요성을 가를 수는 없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뇌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니 그 특출난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뇌만 '나'는 아니다. 온몸이 다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잊어버린다. 하루 종일 내 육중한 몸을 지탱하고 기동력을 주는 고마운 발가락. 누가 감히 발가락을 무시한단 말인가. 무시당하고 억압당한 것들은 언제나 비틀린 모습으로 되돌아 반격을 준비한다. 질병으로, 역행으로, 반란으로.

야트막한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샀다. 저녁마다 구입한 의자에 편히 앉아 한참동안 대야 물에 발을 담가둔 다음 구석구석 싹싹 닦아준다. 그리고 발에게 말한다. "그동안 널 무시해서 미안해. 네가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몰랐어. 이젠 잘할게."

김명주 충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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