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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이불 밖은 위험해

우송대 송지연 초빙교수

신가람 기자

신가람 기자

  • 승인 2019-12-24 14:09

신문게재 2019-12-25 15면

우송대 송지연 교수
우송대 송지연 교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유년기의 몽상들을 되짚는다. 잘 따지고 보면 아이들의 놀이는 본질적으로 이야기다. 소꿉놀이나 병원놀이는 현실을 모방하는 즉흥 역할극이다. 아이들은 매일 새로운 픽션을 창작한다.

엄마아빠 태우고 칙칙폭폭 가다가 장애물이 나와 멈추면, 아이의 아기기차는 날개 돋는 변신로봇이 되어 하늘을 날아 문제를 해결한다. 욕망과 의지의 발단이 있고, 행위를 통한 사건의 전개가 있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갈등이나 난관이 있다. 결말로 가는 과정이 억지스럽거나 전체적인 플롯의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복잡성이 부족하다는 게 열등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험해 그렇지, 오히려 도道는 간단하고 쉬운 법이다. 때로 단순함은 가장 원시적인 뼈대를 보여준다.

나쁜 부모에게 핍박당하는 건 예사, 벽장에 갇혀 살거나 숲에서 길을 잃은 고아들이 주인공인 하드코어 동화들은 또 어떠한가. 새삼 비교육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으로 점철된 아동학대 스토리들은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도록 돕는 심리적 위안의 기능을 수행한다. 잠시나마 엄마를 잃고 혼자 지내야 하는 유치원에서의 몇 시간조차 아이에겐 고아가 된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두려울 수 있다. 어른이 된 우리는 그 시절의 원초적 두려움을 대부분 잊고 살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어려움에 빠진 이야기 속 또래들의 패닉 상태에 동화되었다가 그들의 극복과 승리를 함께 맛보며 알게 모르게 마음의 힘을 키운다.



나는 밤에 잠들기 위해 불 끄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면 그런대로 무서움이 가셨다. 숨 막히고 답답했지만 완전히 잠이 들어서 그 외롭고 적막한 공포가 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꾹 참아야만 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면 광활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무서운 존재가 슬그머니 다가와 나를 건드릴 것만 같았다. 이불은 나를 지켜주는 결계였다.

아이들은 잠이 들 때 엄마와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을 가진다고 한다. 그래서 분리 불안의 문제라든가 정서 형성에 있어서의 애착 부분은 잘 재우고 잘 자는 것과 밀접하다고 한다. 아마 내가 느낀 두려움도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본다.

나도 여느 아이들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을 이겨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꽤 오래도록 내게 재미와 위안을 주어 잠들기의 두려움을 졸업한 이후에도 순수한 놀이로서 즐기곤 했다. 불 꺼진 밤, 불 꺼진 방에서 내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아무런 장난감 없이도 할 수 있는 오직 상상의 놀이.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이불 안에 왼손, 이불 밖에 오른손, 이불 안 왼손은 나, 이불 밖 오른손은 손님이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을 흉내 내면 된다. 이불 안은 아늑한 집이고, 이불 밖은 눈보라가 거칠게 휘몰아치는 북극의 겨울밤이다. 이글루 같은 돔 형태의 지붕 밑으로 타닥타닥 벽난로와 모락모락 식탁과 반짝반짝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 문, 그러니까 이불을 조금 열기만 해도 휘익 위협적으로 불어대는 신의 휘파람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절박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낯선 사람을 나는 선뜻 받아들인다. 그 낯선 사람이 사실은 내 오른손이므로 빨리 이불 속으로 온몸을 전부 숨기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나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에게 감자 건더기가 들어간 소박하고 따끈한 스프와 어느 외국의 그림책에서 본 케이크 조각 모양의 구멍 난 치즈를 대접한다.

'왕좌의 게임'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장벽 너머의 것들이 칠왕국으로 무자비하게 밀려들어오는 위기의 상태를 보여주는 유명 대사, 윈터 이즈 커밍. 나에게도 이불 밖 세계는 죽음이고 밤이고 겨울이었다. 다만 왕좌의 게임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 전쟁이 일어났고 내 이야기에서는 왼손과 오른손 간의 자족적 환대가 있었다. <해리포터>에는 투명망토가 나온다. 그 안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몸을 숨긴 채로 나다닐 수 있다. 장벽이 세계관이라면 투명망토는 소품이다. 이것들은 어린 시절 나의 이불과 얼마나 다른가. 이불 밖이 위험하다는 유년기의 몽상은 의외의 곳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더라. 많은 이야기들이 원래부터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오늘은 오랜만에 아늑한 이불 속으로 당신을 초대하는 상상을 해본다. /우송대 송지연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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