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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슴이 되거나 산타가 되거나

박새롬 기자

박새롬 기자

  • 승인 2019-12-25 13:52
  • 수정 2020-06-30 11:33

신문게재 2019-12-26 22면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전보다는 뜸해졌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에는 캐럴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종소리인가 싶다가 도로록,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기도 한 베이스 음이 많이 들리는데, 가끔은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사진이나 그림 등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볼 때마저 귓가에 맴돌기도 했다. 시즌송의 대표주자 머라이어 캐리나 마이클 부블레는 이 무렵 얼마나 흐뭇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캐럴 중 하나인 '루돌프 사슴코'는 동화같은 가사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된다. 원제는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니까 사실은 사슴이 아닌 순록이 주인공이지만, 순록은 한국인에게 낯설었을 것이며 순록코보다는 사슴코가 발음하기 좋았을 것이다. 노랫말과 달리 순록의 코는 반짝이지 않는다. 다른 동물보다 붉은 빛이 나긴 하는데, 이는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 모세혈관이 코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루돌프 사슴코의 가사는 짧고 굵직한 서사를 지녔다.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만일 내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대며 웃었네/가엾은 저 루돌프 외톨이가 되었네//안개낀 성탄절날 산타 말하길/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그 후로 사슴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네/루돌프 사슴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요약해서 말하면 코가 반짝여서 다른 사슴들에게 놀림받던 루돌프 사슴이, 산타에게 지목받아 썰매를 끈 다음부터 다른 사슴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내용이다.

놀림받던 루돌프 사슴은 캐럴의 가사가 되기 전, 그림책의 주인공이었다. 1939년, 미국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에서 일하던 로버트 메이가 백화점에서 제작하는 책에 수록할 동화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여겨진다. 메이의 아내가 암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딸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그런 딸을 위로하기 위해 메이가 루돌프 사슴코 동화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아이가 집단에서 소외됐다는 건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놀림받는 루돌프 사슴이 동화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건, 아이들에게 들려줬을 때 이해하기 쉬울 만큼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는 일들은 1939년에도, 그 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족을 갖거나,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다니거나,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평생 한 개의 집단에 속해서 사는 사람은 드물다. 소속된 어떤 집단에서는 다수자일 수 있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소수자일수도 있다.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의 발언이나 태도에 따라 한 집단 안에서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언제든 루돌프 사슴의 코를 놀리며 웃던 다른 모든 사슴들이 될 수도,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외로운 루돌프 사슴이 될 수도 있다.

'루돌프 사슴코'에는 다행히 산타가 등장한다. 외로운 사슴의 이야기가 흔한 현실의 반영인 것처럼, 산타의 등장 역시 어쩌면 기적처럼 일어나곤 하는 따뜻한 실화가 투영된 것일지 모른다. 반짝이는 루돌프 코의 가치를 알아보고 썰매를 끌어달라고 말한 사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음에도, 다르다는 이유로 울고 있는 누군가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이 가진 특별함을 주목해 그가 빛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동화처럼 세상에는 산타가 있다. 그는 빨간 코 루돌프이거나 다른 모든 사슴일수도 있는, 당신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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