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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목 아래 키와 목 위의 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20-01-17 00:00
사람은 누구나 어려서 키가 작고 귀여울 때 '꼬마'라는 애칭으로 통하고 있다. 나도 어렸을 때'꼬마'로 통했던 애칭이, 언젠가 부터는 나이에 비해 작은 키라 해서 '난쟁이'로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아마도 그 때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그런 대접은 안 받았을 텐데…….

아마도 성장이 멈춘 것 같은 작은 키였기에 그랬으리라.

성장과정에서 나는 키가 작았으므로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았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된 것도 스트레스였지만 어딜 지나갈 때'저기 난쟁이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때는 죽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갈등과 분노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 바람에 내 이름은 청년기까지 뒷전으로 밀리고 '난쟁이'라는 호칭이 이름을 대신했다. 대학 다닐 때 어디를 지나가면'난쟁이'지나간다며

"대학생이라는 게 초등학생보다 더 작네"라고 하며 조롱과 멸시의 눈초리가 집중될 때에는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남 다 크는 키도 크게 낳아 주시지 못하여 조롱어린 눈초리 시선들이 나에게 모아질 때에는 정말로 삶 자체가 싫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키'라는 말이 나오기면 해도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과민 반응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 나도 사범대를 들어가고 나서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 아래 작은 키는 어쩔 수 없으나 목 위의 키는 자신의 후천적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살 수도 있고 작게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는 목 아래 작은 키로 조롱과 멸시 속에 평가절하된 위상을 어떻게든 만회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것은 바로 남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어 놓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이 못 하는 남다른 것으로 인정받아'키로 잃은 것'을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궁리하느라 여러 날 여러 시간이 걸렸다.

오랜 고심 끝에 가닥이 잡혔다. 그건 바로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많은 작품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다수 작품을 암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보통 선생님들과는 다른 수업- 교안 없는 수업을 해야겠다는 각오가 서기도 했다. 교안 없는 수업이지만 수업 내옹은 알차고 흥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선생님들 교안 쓸 때 나는 참고서 문제집을 여러 권 섭렵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한 시간 수업 준비를 위해서는 참고서 문제집을 7∼8권은 숙독하여 소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자신에게 주문 아닌 주문을 하기도 했다.

< 내가 고등학교 발령받아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나보다 덩치 큰 애들이 맞먹으려 덤비면 어떡하나.>가 오매불망 걱정거리였다. 오랜 숙고 끝에 고심했던 것을 대학 4학년 교생실습 때부터 시험해 보았다. 공주사대부고, 공주고등학교 교생실습 나갈 때부터 시연해 보았다.

교생 실습 첫날부터 남다른 각오로 교안을 써서 밤새 암기했다. 거기에 수업 관련 작품을 닥치는 대로 암송했다. 다행히 대학 4년간 아르바이트 학생 지도로 가르쳤던 내용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생실습 차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갔다. 손에는 출석부와 국어교과서만 들고 들어가 수업을 시작했다. 밤새 써서 왼 교재 내용과 그 동안 아르바이트를 통해 암송했던 작품들이 술술 나왔다. 별도로 준비했던 배경 지식 작품들까지 막힘없이 나왔다. 수업은 성공리에 끝나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끊일 줄 몰랐다. 그 동안 '난쟁이'란 조롱을 받으며 살아왔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맥질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임지 덕산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하는 얘기가 3학년 1반 수업 들어가면 염상○란 학생이 있는데 처음 온 선생님들 울려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은 나를 얕보고 맞먹으려 덤비면 어떡하나 두려움뿐인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겁나는 조바심뿐이었다.

교사로서 맨 첫 수업 1교시 3학년 1반 교실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모든 시선이 작은 키로 서 있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인사를 하고 출석 점호를 마쳤다.

아니나 다를까 교무실에서 힌트를 받은 염상○라는 학생이 질문을 했다. 질문 내용은 국어 문법 문제였었는데 4년간 중·고생 아르바이트하면서 다뤄 본 문제라 무난히 답변했다. 잠시 여유를 두고 질문한 학생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반대편 창 옆에서 또 다른 학생이 연타로 질문을 했다. 그것도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나에겐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대학 4년간 하루 4파트씩 중고생 지도로 안 다뤄 본 문제집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문제 정도는 힘 안들이고 답변할 수 있었다.

두 학생이 짜고서 하는 질문 같았다. 순간 당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밤새 준비한 비장의 무기로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교실 칠판이 모두 이동식이지만 그 시절엔 고정 칠판이라 키가 작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칠판이 높아 판서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키로써는 칠판 공간을 3분의 1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난쟁이 키로는 어쩔 수 없어 학생 의자를 내오라고 했다. 의자에 올라가 판서를 시작했다. 지금 기억엔 판서로 시작해서 판서로 끝난 수업인데 5칠판 정도의 판서를 한 것 같다. 물론 판서는 밤새 암기한 내용을 막힘없이 외어서 했다. 학생 기죽이기 위해서 한 짓이지만 나중에는 팔이 아파서 판서가 어려웠다.

그 다음 시간도 판서할 내용이 남았다고 판서로 시작해서 판서로 끝난 수업이었다. 연거푸 2시간을 그렇게 해 놓았더니 그 후로는 질문은 일절 없었으며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 때부터 학생들이 키 작은 나에게 꼼짝 못하는 거 같았다.

수업반성을 해 보니 그것은 학생들 기죽이기 위한 것이었지 좋은 수업은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수업이 못 되는, 망친 수업 같아서 학생들에게 죄지은 것 같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키가 작은 덕분에 키가 작아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수많은 작품을 암기하여 수업할 수 있게 된 것이며, 다른 선생님들이 하지 못하는 교안 없는 수업을 한 것이 바로 덕분의 결과다. 그로 인해 '걸어다니는 사전 '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유명세를 타고 교사 생활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입소문에 입소문이 되어 초임지 학교 5년 근무로, 70년대 전국의 명문이라던 대전여자고등학교에 할애 내신으로 가게 됐다. 학교 이동할 때마다 할애 내신으로 학교를 옮기다 보니 꼬리표가 붙었는지 가는 학교마다 고3 담임이었다.

39년 교직 생활 중 29년이란 세월을 멍청할 정도 고3 담임을 했다. 학생 가르치는 것이 좋아 마다한 교감 교장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교장 교감만 못했지 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는 다 누렸다. 학생들로부터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았고, 평생교직 생활을 해도 받기 어려운 모범공무원상을 받았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제 10회 TJB 교육대상 중 대상까지 받았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나를 보면 세 번 놀란다는 얘기였다. 첫 번째는 키가 작아서 놀라고, 그 다음은 실력에 놀라고, 세 번째는 학생들을 꼼짝 못하게 다루어 이렇게 해서 세 번 놀란다는 것이었다.

악조건이 훈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하지 않고 분발하면 < '악조건에서 덕분입니다'의 마음으로 살면 거기에서 빛이 나온다 > 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작은 키 난쟁이로 조롱 속에 살던, 과거에는 부모님을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작은 키로 낳아주셔 성공적인 교직생활을 마칠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사람의 키는 목 아래 키와 목 위의 키가 있다.

목 아래 키는 선천적인 것이라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목 위의 키는 후천적인 것이라 노력이나 실천적 의지 집념 여하에 따라 그 양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나폴레옹 같은 분도 목 아래 키는 작았지만 목 위의 키가 큰 분이었기 때문에 역사에 남는 위인이 된 것이다. 성현들이나 위인들, 빛난 이름을 남기신 분들은 모두 목 위의 키가 커서 존경을 받는 것이다.

목 아래 키와 목 위의 키

우리는 목 아래 키는 난쟁이로 살아도 목 위의 키는 작은 거인으로 살아야겠다.

우리는 목 아래 키는 조롱 받으며 살아도 목 위의 키는 존경 받는 거인으로 살아야겠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목 위의 키가 큰 거인으로, 천리향, 만리향을 풍기며 살아야겠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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