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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Episode.25

방독면 도난사건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0-01-17 15:22
리야드연가 책표지 완성본(7월4일)
에피소드25
[리야드 연가-김재석 작가] Episode.25 방독면 도난사건

'나라는 못 지켜도 사물함 옷장에 든 방독면은 내가 지켜야지.'









1991년 1월 중순. 걸프만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병원을 찾아왔다. 컨퍼런스 룸에 한국인 직원들을 모아놓고, 방독면을 지급했다. 의료인들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거라며 꼭 병원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개인방독면 배낭을 메고 출근하는 모습이 어색했지만 정작 리야드 시내로 미사일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총성이나 폭격 소식도 대부분 CNN뉴스에서 보았다. 걸프전쟁은 CNN뉴스와 함께 시작하고 뉴스가 끝나면 마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치 TV에서 비디오게임을 보듯 했다.

외래검사센터 청소부 라만 아저씨는 배낭 매고 출근하는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한국인은 방독면도, 보호복도 주고 너희 나라가 부럽다."

"병원은 적십자정신을 따른다면 폭격 대상이 아니에요."

나는 태화고무장갑을 한 짝 선물하며 그를 다독였다.

"난 가족이 있어.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애가 불쌍해. 나는 늙어가니까 죽어도 후회 없는데 그 애는 살았으면 해. 너 방독면 빌려줄 수 있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에요, 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허탈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만 아저씨는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다닌단다. 혹시나 여기는 안전할까 싶어서…. 세상에 어딜 가나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폭탄 떨어지면 제 옆에 붙어있으라고 하세요. 혹시 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그날 오후에 병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국인 방독면과 제독장치가 든 배낭을 가져간 사람은 10분 이내로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했다. 나도 청소부 라만 아저씨를 보면서 염려가 되었는데 결국 터질 게 터졌다 싶었다. 화학검사센터에 근무하는 돌아이 직원 배낭이 사라졌다. 그는 서랍에 넣어두고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없어졌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자랑 질 깨나 하고 다녔구먼, 하면서 은근히 배낭을 넣어둔 내 사물함 옷장에 눈길이 갔다. 내 방독면을 잘 있겠지….

이 간호부장은 계약해지하고 싶어서 사무실로 찾아오는 한국 직원들을 다잡는다고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은데, 방독면 분실사건까지 터지자 화가 폭발해 버렸다. 돌아이 직원이 간호부장실로 불러갔다. 유리컵이 벽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나 뭐했다나.

사우디에서 절도사건은 벌금형이나 구속 정도가 아니다. 오른손을 자르는 벌을 받는다. 만약 오른손이 없다면 왼손을 자른다. 이미 방송은 나갔고, 범인이 잡히면 못 볼꼴을 보게 될 터였다.

또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금 제자리에 두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며 모르게 갖다 놓으라고 했다. 라만 아저씨는 청소를 하다 말고 태화고무장갑으로 그 큰 머리에 눌러썼다. 그 모양새가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얼굴 모양 뜨려고 꼭, 석고 유액을 바라 놓은 꼴이었다.

퇴근 후, 기숙사로 돌아가면 대피훈련을 받았다. 비상사이렌이 울리고 소등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생물테러 보호복으로 갈아입고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책상 밑에 두었다. 물에 수건을 적셔서 입을 막았다. 혹시 방독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쓰는 비상용이다. 창문 틈새 마다 테이프를 발랐다. 나는 실전훈련을 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방독면을 착용하는 내 자신에게 구라치는 것 같았다. 생화학폭탄이 떨어지면 진짜 살 수 있겠냐고….

"내가 죽더라도 잘 살아야 돼." 하며 나는 동료들이 방독면을 잘 썼는지 봐줬다.

다행히 다음날 방독면 분실 사건은 해결되었다. 밤새 누가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물론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누가 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모르는 편이 낮다. 불신은 독보다도 더 무서운 법이다. 내 눈에 다 도둑놈으로 보이면, 나도 남들 눈에 도둑년으로 보일 수 있다.

'나라는 못 지켜도 사물함 옷장에 든 방독면은 내가 지켜야지.'

더 다행인 건 전쟁이 빨리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직원에게는 두 배로 좋은 소식이 있었다. 병원에 남아 끝까지 지켜준 것에 감사하다며 병원장이 봉급을 두 배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병원장 한국인 사모가 옆구리 푹푹 질렸다는 소문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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