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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톡] 유관순 동상이 뛰어다닌다?… 괴담과 만행 사이

이해미 기자

이해미 기자

  • 승인 2016-03-01 15:08
90년대 혹은 그 이전이라도 대부분 학교에는 동상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책 읽는 소녀, 유관순 열사, 횃불을 든 소년 등. 역사적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국 역사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분들의 모습을 주물로 동상을 세웠죠.

그러나 혹시, 어린 마음에 학교 교단에 세워진 동상들이 무서웠던 적은 없으셨나요?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무렵에는 동상에 관한 괴담들이 서너 개씩은 있었습니다.

밤 12시가 되면 유관순 동상이 깨어나 운동장을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거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싸운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또 책 읽는 소녀의 책장이 모두 넘겨지면 죽는다거나, 유관순 열사의 초상화를 거꾸로 보면 귀신이 보인다는, 세종대왕이 든 책이 다 넘어가면 학교가 망한다는 괴담들이 선배에게서 후배에게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죠.

▲2007년 지정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출처=한민족정보마당
▲2007년 지정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출처=한민족정보마당


그러나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괴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유관순 열사입니다. 1919년 만 16세의 나이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붙잡혀 징역 7년을 선고받고는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듬해인 1920년 만 17세에 순국했죠. 열사의 죽음에 관해서는 참혹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망사유는 방광파열, 인도 받은 시신이 토막 나서 차마 수의를 입힐 수 없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왔죠.

우리에게는 존경과 순국선열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 그렇다면 왜 이런 괴담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요?

1919년 유관순 열사의 독립에 대한 투쟁과 의지는 남들과 달랐습니다.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일본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렸겠죠. 또 모진 고문에도 의지를 꺾지 않는 여학생이 분명 일본군은 미웠을 겁니다. 그래서 순국한 유 열사의 시신을 돌려주지도 않았고 어렵게 인도받은 시신을 매장 했으나, 1936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실되고 말았죠.

일본은 유관순 열사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고 싶었나 봅니다. 독립운동의 최후는 이처럼 참혹하다는 교훈을 심어주고 싶었던 거죠. 또 여자라는 성 차별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떠도는 괴담은 대부분 일본에서 넘어와 한국에 맞게 재설정된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 귀신 이미지는 여자이기 때문에 유관순과 결부시키기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죠. 이렇듯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괴담은 조선인들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만행이 낳은 결과는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올바른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면 목숨 받쳐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삶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허무맹랑한 괴담이야 80~90년대만큼 많이 떠돌지는 않지만 자칫 어린학생에게 잘못된 상식으로 사상이 삐둘어질까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이죠.

한동안 유관순 열사의 영정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영정을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했는데, 투옥당시의 사진을 보고 그린 탓에 실제 얼굴과는 다르다는 의견이 제기됐죠. 이화학당 동창들의 증언을 토대로 새로운 표준영정을 지정합니다. 윤여환 교수가 그렸고 2007년 고시됐습니다. 복식과 뒷배경 등 철저한 고증을 통해 사실성 있게 재현됐다는 평입니다.

3.1절을 맞아 전국각지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괴담에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빛바래지 않도록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려는 자정의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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