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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1월5일:일제의 칼날 보다 더 매서웠던 ‘대쪽 선비’ 최익현

쓰시마섬서 순국 (음력 11월 5일·양력 1907년 1월 1일)

김은주 기자

김은주 기자

  • 승인 2016-11-04 20:00
▲ 면암 최익현
▲ 면암 최익현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으로 1896년 일본의 단발령에 반대해 상소문을 올렸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이 말은 그의 사상이 묻어나 있다. 최익현은 선비가 지켜야 할 도리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음력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철종 재위 중에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을 거치며 내외직을 두루 섭렵한 그는 불의와 부정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를 위해 경북궁을 중건하려하자 열악한 국가재정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충을 알리는 상소로 흥선대원군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1875년 윤요호사건으로 일본이 조선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고 협상을 요구하자, 일본을 믿을 수 없으며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라는 주장으로 위정척사의 운동의 맨 앞에 섰다.

▲ 일본헌병에 체포된 최익현/사진=한국근현대사사전
▲ 일본헌병에 체포된 최익현/사진=한국근현대사사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는 ‘을사 5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을 처단할 것을 외쳤으며, 이후 전북 순창에서 거병해 의병장으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그러나 대한제국군과의 대립에서는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라며 스스로 무기를 내려 일본에 체포됐다.

일본 쓰시마 섬 엄원 위수영으로 압송돼 감금당했지만, 적이 땅에서도 그 기개는 죽지 않았다.

최익현은 75살의 노구로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에 돌입했다. 일본인들이 입에 강제로 음식을 넣어도 모두 뱉어내며 끝까지 저항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나이에 몸을 안 사리 저항으로 최익현은 결국 110년 전 ‘이날(5일)’ 적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개화파에 대한 배척 등 최익현의 폐쇄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백성과 나라를 생각한 그의 대쪽같은 정신은 기억하길./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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