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연의 산성 이야기] '운주산성' 머무는 구름 속에 역사와 함께… 백제계 성의 특성 '한눈에'

제16회 운주산성(雲住山城-전의면 청송,노곡리)

김의화 기자

김의화 기자

  • 승인 2017-10-13 00:00
운주산640
운주산
1호선 국도로 조치원에서 천안 방면으로 15분쯤 거리 운주산(459m) 산성 표지를 따라 고산사(高山寺) 옆으로 오를 수 있다.

운주산은 서쪽의 1호선 국도와 동쪽 691번(목천-공주), 693번(병천-조치원) 지방도 간 세로축들과 북쪽 천안-진천간 21번국도 가로축이 이루는 사각형 중앙 지점이자 천안 목천과 남쪽 조치원 중간쯤 차령산맥상에 위치했다. 서쪽 차령고개 부근에서 차령산맥 줄기가 서와 남으로 갈라져 공주 지역과 천원군을 나누고 동쪽은 미호천과 병천천과 나란한 동림산 줄기가 남쪽 으로 점차 낮아지면서 내려가다가 조치원읍 근처에서 멈춘다.

성벽은 주봉을 포함한 3개의 작은 봉우리들을 아우르며 에워싸 우측이 약간 튀어나온 역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이뤘다. 세 봉우리 사이에 든 전형적 삼태기형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대체적으로 3km가 넘는 성 내부는 과거 여러 채의 민가와 밭이 꽤 넓은 마을을 이뤘던 곳이다. 그런 탓에 서문에 들어서면 퍽 아늑하고 별천지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까지 있었던 민가 터와 밭,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이 갈대밭과 버드나무 사이를 흐르며, 동문지와 서문지 근처에 약수가 나오는 우물이 둘씩이나 잔존하여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 줬다. 근자에 복원과 개축한 성벽 하단부로 성내에서 나오는 맑은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성의 수구 역할을 한다. 다만 그 수구의 모습이 원형(原型)으로 만들어져 양성, 삼년, 성치산성 등이 보여 주는 네모 혹은 오각형과는 달라 유감스럽다. 성의 전체적 인상과 분위기, 서향한 형태 등 연산의 황산성과 흡사하며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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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산성 내부
축성 방식은 지형에 따라 약간 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외벽을 석축하고 흙으로 뒤채움하는 편축법(片築法)을 썼다. 비교적 잘 남은 서벽, 남벽, 북벽들의 일부 성벽을 통해서 약간 다듬어서 직사각형 벽돌 형태를 한 자연 할석으로 비교적 바른층쌓기를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메주 모양의 비교적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한 점, 바른층쌓기를 한 점 등 이 지역 백제계 성들의 공통 특성을 이 성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의 각 회절부는 곡성 형식으로 처리한 흔적이 뚜렷하다. 구릉의 정상부로부터 약간 밖으로 처진 사면(斜面) 부분에 축조한 성벽은 북벽과 남벽 일부 급경사지를 제외하고는 현존 내지 붕괴석 더미가 고루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 전체적으로는 석축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벽 안쪽의 석축 폭은 2m 정도로 보이며 성벽의 기초부는 30~40㎝×50~100㎝ 가량의 자연석을 다듬어 기초를 튼튼히 했으며 뒤채움돌도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함으로써 견고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무너진 돌의 양으로 보아 3~4m는 족히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 회절부, 북벽, 동벽 일부 등 원형이 잘 보존된 곳에 철책을 둘러 둔 점은 보존 차원이나 교육적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도 모범으로 삼아야 할 점으로 생각된다. 정상부를 이루는 북벽 약 600m에는 석재가 거의 없어 대체적으로 토성 형태였던 것으로 보이나 심한 경사로 인해 붕괴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설물로는 동?서?북 세 개의 문지가 확인되나 동문과 남문지를 제외하고 붕괴가 심해 형태가 분명치 않다. 성내의 평지와 구릉간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여럿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된 서문지는 문의 양 편 입구가 직각을 이뤘으나 동문지는 한편은 직각에 다른 쪽은 둥글게 처리했다. 북문지는 토축의 중간부를 잘라 만들었다. 동문지 안쪽에는 세로 3개, 가로 4개씩의 주춧돌이 남은 건물지가 있으며 2×3,4칸의 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들에는 불사(佛舍)지로 추정하고 있으나 문지나 장대지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정상부는 30여 미터의 원형(圓形) 대지가 조성돼 있어 기우제단(祈雨祭壇)의 위치가 아닌가 추정되나 우람하게 세워진 백제얼 상징탑으로 인해 원형을 전혀 찾을 길이 망가졌다.

성의 남단 산봉 주변에 1km가 넘는 토축성이 내성 형태로 남았다. 공주대 전의 지역 고대산성분포 조사보고서는 백제시대 유물과 석재의 가공 흔적이나 축성 방식 등 백제 말기의 형식으로 보아 이 성은 대체로 백제 수도 남천 후 북방 방어를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 후 고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조선 시대에 기우제단이나 불사(佛舍)가 조성된 것으로 여겼다. 성내에서 백제시대 전기 것으로 보이는 경질 토기와 기와 조각, 고려와 조선 시대의 기와편들이 발견되고 조선 기와는 기우제단 주변에 주로 분포돼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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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산성 동문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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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산성 원벽의 모습


운주산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사방을 모두 조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곡간을 통과하는 교통로는 물론 동림산 너머 오창, 청주 지역 미호천변 평야 건너 멀리 상당산성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병마산성은 물론 조치원 평야 건너 저산성, 당산성, 진의리산성까지 시계에 들어 동편의 신라에 대응하기에 유리하다. 동림산 동편 지역은 나·제 대립시는 물론 고구려와 신라 간의 각축장이기도 했으며 신라의 중국과 한성 진출로로도 알려져 있다. 서쪽으로는 1번 도로가 통과하는 전의의 교통로와 그 건너편 이성,작성,금성산성은 물론 웅진 외곽 산성 지역까지 시선이 막히지 않는다. 북으로는 천안∼진천간 21번 국도 주변의 들이 발아래에 전개되고 천안 지역 성들과 아산 지역 산성들의 동향이 감지돼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는 군사들과 고구려 남진시의 대치 관계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웅진기 이후 차령산맥 이북을 향한 최전방에 해당하는 지역인 만큼 운주산은 군사적 기능면에서 가치가 큰 요충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나라의 세력이 극도로 위축됐던 백제 말 웅진성 보호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이런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백제는 여기를 다수인이 집결, 장기 활동이 가능한 거점으로 삼고 축성했고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활용을 계속해 온 것이다.

고산사의 백제 의자왕 유령비와 그 아래에 기도처에 과연 이곳에 위령비를 세울 만한 의자왕과 운주산성이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운주산은 멀리 남쪽에서 바라보면 미인의 눈썹(蛾眉=아미)같은 산의 자태가 참 아름답고 인자해 보인다. 이름도, 구름이 사는(머무는) 곳이듯이 산 중턱, 성안에 구름띠가 걸쳐진 속에 학과 신선이 살 듯 싶다. 백운과 벽공, 군더더기 없는 청산에 눈이 시리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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