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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기막힌 타이밍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방원기 기자

방원기 기자

  • 승인 2019-07-30 09:05
임숙빈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이른 아침 업무차 다른 도시에 있는 캠퍼스로 이동하고 있었다. 간간이 있는 일이기에 기차, 지하철, 버스 등을 갈아타는 경로이지만 별스럽지 않은 마음이었다. 도착한 기차역에서 지하철을 타러 이동해 플랫폼에 섰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시(詩) 한편, 여러 해 전 돌아가신 김규동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보이리 길이'. 노시인의 '당부'는 간결하면서도 선명했다.

곁에 선 교수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하며 이른 아침 우연히 만난 가르침을 기뻐했다. 그러는 중 발견된 실수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벌써 두 번이나 지나간 건너편 전철이 우리가 타야 할 차편이었다. 함께 이동하고 있는 교수나 필자 모두 별생각 없이 움직이다가 벌어진 현상이었다.

방향을 바꾸어 열차를 타고 환승하는 시간 내내 우리는 방금 읽은 시 구절을 넣어가며 저지른 실수에 대해 웃었다. 전철에 올라가다가 막히면 앉아서 쉬라고 했다며 빈자리에 앉은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온다. 이런 우연이… 그 날 함께 모여야 할 또 다른 교수가 바로 옆자리에 있던 것이다. 방심한 결과 열차를 두 번이나 놓친 후 탄 열차에서 만난 이 상황을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신기했다. 어째도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둥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운 길이 되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내려오게 되었다. 서둘러 내려오고 싶은 마음과 일찍부터 움직였으니 조금 여유 있게 가라고 권하는 마음이 엇갈리는 가운데 기차표를 30분 늦은 것으로 예매하였다. 하지만 막상 냉면 한 그릇씩 먹고 나니 시간이 남아 결국 30분 당겨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대전역에 도착하니까 물폭탄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차장은 신발이 빠질 정도로 물이 차오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제법 기다렸는데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기에 작은 우산에 머리만 가린 채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잠깐 사이였지만 여지없이 흠뻑 젖고 말았다. 시야가 흐려 불안할 만큼 퍼붓는 빗속을 뚫고 대학으로 돌아오는 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게 드러났다. 이럴 수가! 그 날 소낙비는 딱 30분 내렸다고 한다. 두 도시를 오가며 보낸 그 날 하루는 내게 '타이밍'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였다.

우연처럼 벌어진 실수로 인해 자칫 모르고 지냈을 오래 묵은 시인의 당부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고, 직장 동료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간발의 차이로 만나는 즐거움을 경험했고, 조급함으로 비에 온통 젖어버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음도 깨달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그저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중요한 생활사건이나 국가적 사회적 중대사라면 어떨까?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이즈음, 기막힌 타이밍으로 환히 웃을 수 있는 일들이 좀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를 살리는 근원적 힘이라는 신바람을 북돋울 수 있지 않겠는가. 우직하게 살아가는 이는 우직함을 에너지로, 머리 쓰며 살아가는 이는 머리를 쓰는 에너지로. 그리고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약간의 여유만 가졌어도 겪지 않을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견디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음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인의 당부를 새겨보면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다가 막히면 잠시 앉아 숨을 골라야 한다. 그러면 길이 보인다 하지 않는가.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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