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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한글을 사랑한 호머 헐버트

이성희 기자

이성희 기자

  • 승인 2021-10-12 08:40
  • 수정 2022-04-30 23:04

성희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을 기념하는 한글날이 있는 10월이다. 한글날만 되면 주요 포털을 비롯한 신문과 방송은 앞 다퉈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뉴스를 생산해낸다. 국민들도 이날만큼은 비속어와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려 한다.

언어학자들은 한글을 최고의 글자라고 말한다. 중국어는 표의문자로 모든 글자를 다 외워야 하지만 한글은 표음문자라 배우기도 쉽고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무려 1만 개가 넘는 소리의 표현을 할 수가 있다.

한글날만 되면 떠오르는 외국인이 있다. 한글을 사랑하고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자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뽑힌 적이 있는 호머 헐버트다. 헐버트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목사로 육영공원 교수로 근무하며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이자 언어학자, 항일운동가로 활동했다.



한글의 우수성과 매력에 푹 빠져 단시간에 한글을 공부해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양반들이 한문만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기는 사태를 안타까워했으며 최초의 순 한글 지리사회 총서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기도 했다.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고 논문작업에 몰두했다. 다시 선교사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헐버트는 선교활동을 펼치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입국 당시 신식 인쇄기를 한국에 들여 온 헐버트는 다양한 책들을 발행하게 되는데 이때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도 출판하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 헐버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일제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줄곧 주장했다.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명의 특사를 파견하는데 큰 일조도 하게 된다. 결국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해 특사 파견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헐버트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탰다. 이후 대한제국이 독립을 하게 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 헐버트는 한국을 방한하게 된다, 그러나 여독과 노환으로 한국을 찾은 지 일주일 만에 헐버트는 사망하게 된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는 걸 희망했던 헐버트의 유언대로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한국인보다 한국과 한글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이 남긴 일화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크나큰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 디지털룸 이성희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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