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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단 한 번 뿐인 긴 여행이다

김소구 한국지진연구소 소장
많은 어려움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행복한 삶의 이야기 펴내다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4-07-13 01:16
김소구
“이 책의 집필 이유는 결국 인생은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집념하면 성취할 수 있고 행복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 세대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김소구 한국지진연구소 소장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긴 여행이다>를 펴낸 뒤 이같이 말했다.

김 소장은 “아무리 길이 험악하고 잠자리가 누추해도 계속 가야 하는 여행이 인생”이라며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다 보면 행복할 때와 어려운 시련이 있을 수 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도중에 인생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면 삶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과학자로 살면서 발견했고,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긴 여행이다>를 쓰면서 많은 어려움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행복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며 “만약 제가 꽃길만 걸었다면 그러한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인생은 여러 종류의 길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길을 택하여 살아가느냐에 달렸다”며 “물론 재물과 귀족 출생으로 출발한 행운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저 자신을 솔직하게 전부 보여주는 것은 다음 세대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자신을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결점과 부족한 면도 있다”며 “때로는 불편했던 누군가와의 관계를 표출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배들에게 삶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배우게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군가는 결코 저와 같은 길을 가지 말라는 뜻”이라며 “제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 중 또 하나는 결국 인생은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집념하면 성취를 할 수 있고 행복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학자로 살면서 발견한 것을 다음 세대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더욱이 “온갖 산전수전을 경험하면서 배운 지혜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터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짓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한 인간의 보람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대표적 예가 신의 존재와 천안함 침몰의 미스테리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과 같이 저는 어려운 시기와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저에게는 항상 푸른 꿈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며 “저는 파란만장한 영화 같은 삶을 살았지만 늘 긍정적이었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또 “북한에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매일 퍼붓는 미군 폭격과 전염병으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며 “북쪽으로 떠나는 피난길 도중에 운 좋게도 남쪽을 택해서 도랑 따라 도망해 온 곳이 남한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피난민 수용소와 낯선 남한 땅에서 타향살이 설움과 가난의 어려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며 “전쟁 때문에 오랫동안 학교를 떠난 저로서는 자유롭게 학교에 다니는 남한의 학생들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운좋게도 피난민 학교에서 시작에서 남한의 정규 국민학교로 전학해서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했다”며 “어려운 피난민학교에서 학생회장을 거치면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리더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김소구 소장
김소구 소장
그는 “가난했지만 재미있고 행복했었다”며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서울고에 합격해서 첫 번째 자신감과 자부심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당시 저는 서울중학교가 아닌 타 교에서 서울고로 진학한 이른바 '타교생'이어서 더 당당해지려 애썼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김 소장은 또 “대학은 자유와 방종을 만끽하는 일반 대학보다 실력과 정의를 생명으로 하는 해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다녀보았다”며 “여기서 '다녀 보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곳이제가 평생을 바칠 저의 길이 아니고 또 저를 필요로 하는 곳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인생진로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김 소장은 “저는 무한대의 제 꿈을 펼쳐볼 그림을 그려보았다”며 “항상 높은 이상과 무한한 꿈이 있었고, 제가 이룰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서는 출세와 권력의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는 법대를 종용했지만 이 또한 저의 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결국의 선택은 신앙적 진리와 지식을 추구하고 학사규정이 엄격한 서강대학 물리학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술 더 떠 세계 최고가 모여 경쟁하는 미국으로 유학해 자연과학(물리)분야를 전공하고 싶어서 서강대학 2년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시도했지만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2년을 더 버텨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국 졸업을 하고서야 유학의 길을 떠났다”며 “당시 대재벌 그룹의 유명기업에 입사할 기회도 있었지만 재물이 저의 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강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면서 제가 이 분야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물리학을 이용한 응용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오리건주립대학 (OSU)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해양학과로 전과해 지구물리학 분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다른 관심과 집념 탓에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박사학위를 따냈다”며 “뿌듯한 성취감에서 저는 자신감의 행복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유학 시절 5년 동안 계속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미국문화와 미국인들의 특성을 잘 알게 되었다”며 “며칠씩 밤을 새며 공부하면서 무서우리만치 노력하는 저의 룸메이트 일본 학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뒤 첫 여름방학 때는 오리건(Oregon)주 코발리스(Corvallis) 시골 농장 콩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석사과정을 마친 후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장노동, 어부, 부동산중개업, 식당, 보석상, 택시운전사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미국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 제가 비영주권자이지만 박사학위를 받기 한 달 전쯤에 오클라마주 툴사(Tulsa)의 한 석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며 “이를 받아들여 선임지진파 분석가(Sr. Seismic Analyst)로 취직하니 마침내 미국에 정착해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 또한 길지는 않았던 게 조국의 부름 때문이었다”며 “미국생활을 접고 초빙유치 과학자로 귀국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석유회사는 재미도 있었지만 제가 평생을 몸 둘 곳이 아니라는 것은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며 “저의 프로젝트가 80% 밖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회사는 제 작품을 상품화하고 제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는 정확하고 완벽한 것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했는데 이것은 지식을 재물과 권력보다 우선에 두는 저의 철학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마침 저를 필요로 한다는 한국정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 전달됐다”며 “'외국 고급과학기술인 유치 프로그램'에 의해서 지진학박사 1호로 초빙되어 금의환향했고, 귀국 후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운 좋게도 한국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 부교수로 초빙해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대학에서는 우리나라 지진연구의 선구자로서 국내 지진연구에 관한 수많은 과제를 수행했다”며 “해외의 많은 석학과 공동연구는 물론 우수한 해외 연구원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구물리학과 지진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제학회에 참가하고 해외 초빙교수로 세계 여러 나라 연구기관에서 학술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며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거나 장기간 거주하면서 현지인들과 접촉하고 국제공동연구를 하는 동안 외국문화를 많이 경험하고 배운 것 또한 제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렇게 장밋빛 인생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며 “한참 잘 나갈 때 몽골국립대학 유학생에게 일이 터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구물리학 박사학위 3년 차 대학원생이 실험실 화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피해 가족과 학교 측 쌍방이 제게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며 “고통과 불이익에 대한 호소를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이 있었지만 제가 도의적 죄책감 외에는 책임질 일은 아니어서 끝까지 편하게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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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표지
그는 “제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여름방학 동안 잠시 택시 운전기사를 할 때 난감한 일이 생겨 하느님을 찾아야 했다”며 “벽을 쳐다보고 기도를 했던가 싶은데 난생 처음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환청이었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라는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를 환각처럼 들은 후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잘 해결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진학 분야에서 유명한 예수회 계통의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연구조교 장학금 통지서를 보내왔고 이어 가을학기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됐다”며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성직자를 만나게 되고 이 때문에 가톨릭교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후 저는 매일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며 찬양하는 열렬한 신자가 됐다”며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았을 때 다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던 저의 초심을 바꾸게 만든 것도 기도에서 나온 하느님의 응답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퇴근할 때마다 공원에 들러 기도할 때 갑자기 ‘그들은 당신이 필요하다(They need you)’는 환청이 들렸다”며 “이로부터 유치과학자 초청을 승락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저의 인생은 모든 것이 하느님과 함께 50대 후반까지 진행됐다”며 “ 그 후 저는 하느님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성경을 비롯해 많은 고대 문헌과 종교와 철학서적에 골몰하면서 더 깊이 과학철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한동안 아주 진실한 가톨릭신자였지만 지식이 늘어갈수록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저의 분야인 물리학, 지구물리, 해양학, 지진학 등의 자연법칙에 집념하면서 전문지식이 축적됐다”며 “국제학회 또는 공동연구로 여러 나라에 체재하면서 해외의 많은 석학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세상을 더 넓게 알게 되었고, 국제학술지에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면서 한 과학자의 집념과 발견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지금까지 인문학적 또는 종교적 철학관에서 새로운 과학적 철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기초로 기존의 철학과 종교적 관점에서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자연법칙 관점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며 “제가 과학자의 길을 가면서 발견한 것은 신이란 절대적,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신이란 인간이 과학적 집념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믿고 자연원리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자연주의론자 (Naturalist)가 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의 집념으로 종교처럼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을 믿고 떠돌아다니는 천안함 침몰원인의 물증을 정확하게 발견해서 국제학회는 물론 국제학술지와 저술로 발표해서 역사에 길이 남게 했다는 것이 보람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자가 된 원인이 “ 어렸을 때부터 상상해보는 것을 즐겼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아 한 가지 문제를 잡으면 해결할 때까지 절대 포기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문제를 풀려고 하면 그것에 집념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해결하므로 진리를 발견한 성취감에 크게 만족한다”며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재물과 권력보다 지식에 인생 목표를 두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왜 과학자가 되었나 다시 물어도 진실을 찾기 위해서 과학자가 되었다고 답한다”며 “성취는 집념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저는 천안함 침몰의 진실을 밝히는데 책임과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운 좋게도 많은 은인들을 만나는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며 “저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한테 빚을 졌고, 저의 아들까지도 저에게 많은 관련 자료와 서적을 보내줄 뿐만 아니라 냉정한 비평과 논쟁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쌓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도와주셨던 많은 은인들과 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 글을 보내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김소구 소장은 서울고, 서강대학 물리학과 졸업 이학사,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원 (OSU) 해양학 지구물리학 이학석사, 미국 세인트루이스(St. Louis)대학원 지구물리학 이학박사로, 한양대학 물리학/지구해양과학과 부교수/교수,한국지질자원연구원 유치과학자,미국 사이즈모그래프 회사 석유탐사자료실 선임지진파분석연구원을 역임했다.

호주 지진연구소/BMR 객원 연구원, 호주 New England 대학 지구물리연구소 교환교수,독일 Hamburg 대학 지구물리연구소 교환교수,노르웨이 (Norway) NORSAR 방문 과학자,한양대학교 물리학과/지구해양과학과 교수,미국 Univ. of Colorado/NOAA 박사후 연구원,일본 국제지진.지진공학연구소(IISEE) 객원 연구원,한국 동력자원연구소 선임 연구원,미국 Seismograph 회사 선임 연구원,연구과학자 (R/V Kanakeoki)지구물리연구소(HIG) 미국 Univ. of Hawaii,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지진예보이론 이론지구물리연구소(IIEPT) 방문과학자,독일 Potsdam 지구물리연구소(GFZ) 초빙교수를 역임헀고, 현재 한국지진연구소장이다. 필리핀 화산·지진연구소 (PHIVOLCS) 초빙연구원 (소장 초청), 일본 Hokkaido 대학, 지진·화산 연구소 초빙교수 (북해도대학 총장 초청),중국 북경대학 우주·지구물리대학원 초빙교수 (우주.지구물리 대학원 원장 초청),오스트리아 (Austria) 비엔나 (Vienna),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 (CTBTO) 초청발표자 (SnT2015/IHW2015), Vienna, Austria, June 22-30 2015로 활약했다.

주요 저서로 <지구과학> (개정 4판), <실용지진학>, <지진학 원론>, <이론지진학>, <격동하는 지구-지진>, <Digital Seismology >(영문) 등이 있고, 국내외 주요논문 150편 이상을 발표했다.


한성일 기자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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