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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식 기자<사진=김정식 기자> |
왜냐고?
이 나라에서 돌은 늘 약한 자에게만 날아가니까.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조용히 넘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고, 어느 순간 '명망가'로 환생한다.
반면 누군가는 열여덟, 열아홉 살 때 잘못 하나로 평생을 매장당한다.
최근 배우 조진웅의 경우가 그렇다.
소년 시절 범죄로 처벌을 받고 교화 과정을 거친 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단두대에 올라섰다.
마치 "너는 평생 죄인이어야 한다"는 듯이, 한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무력화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낯선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황영웅.
학창 시절 사건들은 서로 합의가 이뤄졌고 법적 절차도 마무리됐지만, 결국 그는 미래를 잃었다.
소년 시절 잘못이 평생 낙인으로, 그리고 직업적 사형선고로 이어졌다.
반면 이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큰소리치며 살아가는가.
나라를 팔아넘기고, 동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친일과 학살의 역사는 아직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 후손들 중 다수는 오늘도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사회의 주류로 살아간다.
재벌·권력자·정치권의 비리와 범죄는 잊는 데 몇 주면 충분하다.
언론은 사고의 크기보다 가해자의 무게에 따라 기사를 다룬다.
무거운 사람은 가볍게 다뤄지고, 가벼운 사람은 무겁게 찍힌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묻는 것인가.
이 사회는 말한다.
"소년범은 갱생할 기회를 줘야 한다."
법도 그렇게 설계됐다.
소년원도, 보호처분도, 교정 프로그램도 모두 '두 번째 기회'를 기본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사회는 그 두 번째 기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법은 용서를 말하는데, 사람들은 영구추방을 선고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술가에게는 늘 유독 가혹하다.
정치인은 구속돼도 다음 선거에서 당선된다.
재벌은 횡령을 해도 불구속이다.
대기업 총수는 사면과 복권의 순환을 반복한다.
그러나 가수, 배우, 예술가는 젊어서 실수한 한 번의 기록으로 평생이 날아간다.
그들이 국민에게 준 위로, 감동, 예술적 기여는 단 한순간도 고려되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죄가 사라지고, 권력이 있으면 죄가 희석되며, 예술가와 약자에게는 죄가 '대물림되는 것처럼' 따라붙는 이 역겨운 구조를 외면할 수 없다.
조진웅이든, 황영웅이든 우리가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그들 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잣대다.
소년범은 처벌 뒤에 사회로 돌아오라고 국가가 말한다.
그러나 사회는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법과 제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갱생을 이야기하는가.
왜 변화의 가능성을 말하는가.
죄는 처벌로 끝나야 한다.
그게 법의 정신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끝나지 않는 죄'를 발명해 약자에게 들이민다.
그 죄는 갚을 수도, 벗을 수도, 잊을 수도 없다.
그냥 평생 따라다니는 족쇄처럼 존재한다.
이 수첩은 조진웅을 변호하려는 글이 아니다.
황영웅을 미화하려는 글도 아니다.
다만 묻고 싶다.
우리가 정말 정의로운 판관인가.
아니면 편의적 분노로 약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군중일 뿐인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했을 때, 어쩌면 우리는 한 번쯤 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남=김정식 기자 hanul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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