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은 건물들, 젊은 창작자들 손에 공방·카페로 변신
매월 열리는 '123사비공예마을 규암장터'로 활기 넘쳐
작가들과 방문객이 함께하는 체험 프로그램 제공
쇠락했던 마을, 공예로 새로운 시간 준비

금상진 기자

금상진 기자

  • 승인 2025-12-23 14:49

신문게재 2025-12-2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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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백마강변 둑길을 따라 자리잡은 규암마을. 마을의 큰 길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다. 금상진 기자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물길 위로 백제대교가 놓여 있다. 그 아래, 수북정과 자온대가 강변을 내려다본다. 자온대는 머리만 살짝 내민 바위 형상이 마치 엿보는 듯하다 하여 '규암(窺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바위 아래 자리 잡은 규암나루는 조선 후기부터 전라도와 서울을 잇는 금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강경장, 홍산장, 은산장 등 인근 장터의 물자들이 규암 나루를 통해 서울까지 올라갔고, 나루터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과 상인들이 오고 가는 번화가였다. 그러나 1968년 백제대교가 개통하며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다. 생활권이 부여읍으로 바뀌고 수운과 장터 기능이 사라지면서 마을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마을, 지역 소멸의 사례가 될 뻔했던 규암에 수년 전부터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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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에 버스를 싣고 강을 건너는 규암마을 전성기 규암 나루의 풍경. 사진=부여군 제공
젊은 창작자들과 공예가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싸늘했던 마을에 온기가 돌았다. 폐가나 다름없던 가게에 불이 들어왔고 낡은 창고가 공방과 카페로 변신했다. 도자기, 목공, 섬유, 한지, 금속, 책과 기록을 다루는 작가들이 자리를 잡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지원이 더해지면서 '123사비공예마을'이 탄생했다. 공예 마을을 걷다 보면 예스러운 느낌의 공간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공간 안에는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작가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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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마을이 번성했던 시절 낡은 식당 건물을 개조하여 재탄생한 공방 '선화핸즈'. 금상진 기자
소멸 위기에 있던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프라가 생겨났다. 여기에 작가들의 주거를 위한 행정적인 지원이 더해지면서 정주 여건 개선이라는 효과도 얻고 있다. 2022년 대비 유동인구 24% 상승이라는 구체적인 성과도 있었다. 도심의 화려함에 익숙했던 작가들도 조용한 시골 마을의 풍경에 만족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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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소품이 공존하는 아기자기한 서점 공방 '북토이'. 사진=123사비공예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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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규암 가축병원을 개조하여 재탄생한 공방 '부여스튜디오'. 사진=123사비공예마을 제공
서울에서 활동하다 규암마을에 자리 잡은 최정민 작가는 "낡은 건물과 쓰레기가 가득했던 지금의 공간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상품 개발 위주로 활동했던 나에게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게 해준 곳"이라고 말했다.

스튜디오 부여를 운영하는 이소영 작가는 "지금도 오래된 공간을 보면 설레고 무언가 도전하고 싶은 느낌이 든다"며 "건물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문제도 발생했지만,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자리 잡은 지금은 뿌듯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북토이 서점을 운영하는 정용선 작가는 "공예 마을의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지금은 완전히 적응하고 동화된 상태"라며 "사업상 서울에 가게 되면 빨리 부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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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사비공예마을 공방에는 다양한 테마를 가진 장신구와 소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사진은 북토의 서점의 장신구 소품들. 사진=123사비공예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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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사비공예마을 공방에는 다양한 테마를 가진 장신구와 소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사진은 부여 핸즈의 장신구 소품들. 사진=123사비공예마을 제공
123사비공예마을에는 현재 12개의 공방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마실 거리나 카페도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기존 주민들의 낯선 시선이 있었지만, 지금은 함께 소통하며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고우리 사업단장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니 조금은 경계하는 시선도 있었을 것"이라며 "지금은 어떤 행사나 이벤트도 마을 어르신들이 먼저 나서 주신다. 소통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마을 발전에 대한 고민도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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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사비공예마을에서는 매주 마지막주 주말 프리마켓 장터를 열어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금상진 기자
매월 마지막 주 주말에 열리는 '123사비 공예마을 규암장터'는 마을의 변화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규암나루 인근 아트튜브센터에서 열리는 장터에는 사비공예마을뿐 아니라 계룡·논산 등 인근에 거주하는 작가들도 참여한다. 장터에는 이들이 만든 공예품과 먹거리가 있고, 방문객과 여행자들이 직접 체험하는 공예 체험 행사도 열린다. 장이 열리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분주해진다. 계절별, 테마별 다양한 체험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다.

목공 공방을 운영하는 전병일 작가는 "매장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니 정보 교류도 되고 상품 홍보도 하고 있다"며 "단순히 물건을 판다는 것보다 사람을 만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부여에 살고 있다는 한 방문객은 "평소에 이곳을 지나다 보면 신기한 가게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이런 장터가 있는 줄 몰랐다"며 "장터 주변의 경관도 좋고 조용했던 시골 마을에 활력이 느껴지는 것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쇠락한 산업과 인구 감소로 정지된 듯 보였던 규암마을은 이제 '공예'라는 매개를 통해 도시와 사람, 공간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떠났던 발걸음 대신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고, 비어 있던 공간에 창작의 시간이 채워지고 있다. 마을을 향해 불어오던 바람이 다시 생기를 품기 시작한 지금, 규암은 과거의 번영과 쇠락을 넘어 또 한 번의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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