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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천 교수 |
당시 천연두는 마마, 두창, 역질로 불렸던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혹독한 질병이었다. 천연두는 1798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우두에서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이후 1979년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천연두 박멸을 선언함으로써 인류가 처음으로 박멸한 병이 되었다. 지석영은 일본인 의사에게 임상을 통해 종두법을 배워 처가인 충주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지석영은 정약용이 저술한 『마괴회통』을 통해 우두 접종을 통한 천연두 처방법의 기초를 알았지만 서양 의술을 익힘으로써 천연두 치료와 우두 보급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지석영이 일본인 의사로부터 종두법을 배우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만든 사전인 『언어대방』의 국문 오자의 교정을 부탁받았는데, 이를 통해 국문법의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고 국문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관립 의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서는 본격적으로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써 근대 계몽기 국문 표기법을 체계화하는 데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지석영은 1896년에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 제1호에 자신의 '국문론'을 발표하면서 "나라에 국문이 있으나 힘을 다해 쓰지 않으니 귀중한 줄을 모르고 그 쓰임이 전일하지 못하여 기록할 수도 없다"고 하여 표기법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국문에 대한 자신의 선각적 지식을 밝혔다. 그리고 1905년 7월 8일에는 국문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새로운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1905년 7월 19일에 즉각적으로 지석영의 국문 개혁안을 수용하였는데, 이 개혁안이 <신정국문>이다.
지석영은 국문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 국문 교육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대해 고종은 "참으로 백성을 교육하는 요점"이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신정국문>이 발표된 것이다. <신정국문>에서는 국문 6개 항목에 대한 규정을 제시했는데, 음소주의 원칙을 표방하고, 된소리 표기는 합용병서(ㅺ, ㅼ, ㅽ, ㅆ, ㅾ)로 표기할 것을 내세웠으며, 특히 '·'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석영 한 개인의 안이 아무런 논의 과정 없이 공포되고 실시되자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으니, <신정국문>에서 지석영은 음소주의를 표방하고 있어 이 부분이 표의주의를 주장하는 주시경의 입장과 대척되는 지점이었다. 이것이 결국 학부 안에 주시경으로 중심으로 한 국문연구소가 만들어지고 표기법과 관련한 중요한 원칙들이 논의되고 <국문연구의정안>이 만들어지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지석영은 국문연구소의 위원으로도 참여하고 <국문연구의정안>을 작성하는 데에 관여하여 국문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펼쳤다. 또한 1909년에는 종래의 한자 자전과 달리 『자전석요』를 저술하여 한자의 음과 뜻을 한글로 단 한자 자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지석영은 1921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대요' 제정에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에 조선어학회의 '한글마춤법통일안'이 제정될 때는 반대하기도 하는 등 국어 표기법에 관한한 뚜렷한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편, 지석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대구 감영의 판관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국문 표기법 제정에 참여하는 등 친일적 행위를 하는 등 나약한 지식인이 면모를 보였던 점은 치명적인 과오이지만 그가 근대 조선에 서양의 의료 체계를 도입하고 종두법을 보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천연두의 병마에서 벗어나게 한 것과 국문 표기법 연구에 매진하고 한글 보급에 힘쓴 교육자였던 점은 분명한 사실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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