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세상]민족의 희로애락 담아 대중가요 인기

번지없는 주막 4

김명환 작가

김명환 작가

  • 승인 2008-08-27 00:00

신문게재 2008-08-28 12면

1929년 최초 창작가요 ‘낙화유수’발표… 레코드 시대 개막
일제의 가요 탄압 속 백년설 ‘번지없는 주막’ 등 사랑받아


번지없는 주막 노래를 부르다가는 잠시 후엔 통곡의 소리로 변하여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술잔에 눈물을 흘리면서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을 연이어 부르다가 끝내는 통곡을 한다. 이렇게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수 없이 늘어만 갔다. 그만치 당시의 우리 조선 사람들은 마음이 어느 한곳에 머물 수가 없을 만큼 외로움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야했다.

그것은 빼앗긴 민족의 번지를 찾고 싶었서다. 그러기에 수없는 사람들이 숱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번지 없는 주막이라는 노래를 목 놓아 부르면서 빼앗긴 번지를 찾고 져 함이 아니었는지 생각게 한다. 아무튼 당시에 우리가요는 민족의 혼이 담기지 않은 노래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일제가 우리 가요인 들을 못살게 괴롭히고 툭 하면 잡아다가 유치장에 가두는 등 노래 가사 하나하나를 트집을 잡지 않은 노래가 거의 없었다. 그만치 일제는 우리 조선민족 에게 어떠한 트집을 잡아서 라도 괴롭혔다. 이것뿐이 아니다 어떤 때는 조선 총독부라는 곳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기획을 하여 전국 각 순사청 그러니까 지금의 경찰서에 특별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우리 조선 민족들이 나그네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여러 가지노래를 부르며 민중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이들을 잡아다가 이러한 선동성이 있는 노래는 다시는 부르지 못하게 처리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지시가 내려지자 일선에 있는 각 경찰서 에서는 당시에 유행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마구 잡이로 붙잡아다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는가하면 그들이 판단할 때 일제에 저항성이 강하다 싶으면 어떤 방법을 취하던 형사범으로 올가미를 씌워 감옥에 보내는 등 그들의 악랄한 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니 죄 없는 우리 민족들이 어떠했을까.

필설로써 어찌 이런 일들을 다 표현할 수가 있으랴 그것뿐이 아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들을 이렇게 압박을 가하며 끝내는 앞에서 밝힌바 처럼 우리 민족들을 일제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일들은 쉴 수없이 자행됐다 이러한 세상에 나그네설움 또는 번지 없는 주막 등 우리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까지 발표 되었으니 일제가 그 얼마나 우리 민족들을 괴롭혔는지는 알 만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 가요가 숱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지금껏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만치 우리 가요는 우리 인간의 가슴 속 깊이 혼이 담겨 있음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요는 삶에 대한 희비애락 그러니까 당시에 우리의 삶에 혼이 담겨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요는 번지 없는 주막이 노래 후 에도 민족의 혼이 담 긴 노래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 노래가 하나하나 발표 될 때마다 일제는 온통 정신을 곤두 세우고 그 노래 소리를 따라 ?아 다니는 꼴이 되었다. 다시 말한다면 보이지도 않는 물체를 그러니까 허공에 떠도는 노래 소리를 따라 그 소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다녔으니 이 얼마나 일제가 어리석었든지 알 수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옛 노래 하나하나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요는 당시의 민족의 한을 그리고 가슴에 응어리 진한을 구구절절 이 풀어준 노래가 바로 우리 대중가요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가요가 처음으로 발표된 시기는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 1920년대가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한다. 최초의 창가는 일본 노래를 신파극단에서 배우 들이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번안가요로 시작을 하게 된다.

1925년 8월 신보에는 이 풍진세월이란 노래가 림보노홍 시식 창가라는 부제목으로 박채선 이류색이 병창으로 무반주로 레코드 취입을 했다고 되어 있으며 그 후에는 김산월도월색의 이 풍진세상이 있다. 또 그 다음에는 1930년도 초창기에는 희망가라는 제목으로 채 귀엽 이 불러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발표돼 널리 알려졌다.

이 풍진세월 이 가사만 바꾸어서 희망가로 변한 것이다. 노래 가사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 노래는 당시에 그러니까 1910년 일본의 가마쿠라앞다에 노지마에서 두자개성 중학생 들이 여행을 왔다가 돌풍을 만나 배가 전복돼 12명의 학생이 수장 됐다. 마침 학생들을 인솔했던 가마쿠라 여학교 선생인 영국인 ‘가든` 이란 사람이 작곡을 했다.
그리고 추도사로 불려 졌던 멜로디가 변형 되었다. 그러한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서 지금 까지 부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26년도에는 도월색의 노래 ‘압록강 절`일 본 어로 말한다면 ‘요록 꼬 부시`가 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김월산이 부른 장한몽 일명 이수일과 심순애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등이 있다. 그 당시에 노래들은 구전 민요가 많았다. 또 외국 곡을 번역하여 부르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요의 최초의 창작은 당시에 낙화유수라는 노래였다. 당시에는 노래라고 하지 않고 창가라고 불러질 때다. 낙화유수는 1929년 콜럼비아 레코드회사에서 4월 신보로 발표됐다. 이 노래는 당시에 이정숙이라는 가수가 첫 취입을 했다. 그리고 가사는 김 서정이며 작곡은 김영환이 했다.

이들이 우리 한국 가요사에 최초로 레코드 취입을 한 사람들 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가요를 최초로 창작하여 발표한 아주 서정적이며 우리 고유의 가락을 충분히 담아낸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요가 시작되자 이어서 강남제비 강석연 노래 등 수많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것이 우리 가요사의 최초의 발달사다. 여기서 작곡가 김영환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김영환은 작곡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시나 리오작가이면서 영화감독 미술 영화제작 또는 당시에는 무성영화 시대다. 그래서 변사가 필요 했다. 그 변사는 배우들의 움직이는 입술을 따라 대본을 읽어줘야 한다.

가령 여자 배우일 경우는 여자의 목소리로 변사를 해야 했다. 이런 것까지도 김영환이 해낼 정도였으니 김영환의 재능은 팔방미인으로서 지금도 우리들은 기억하며 그를 우리 대중예술사에 큰 업적을 남겼음을 밝히는 바이다. 극영화 낙화유수도 그의 시나리오로 1927년도 제작했다. 거기에 주연배우는 복 혜숙 이 원용이 열연을 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낙화유수노래는 그 영화주제가로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낙화유수는 영화대사를 레코드취입을 하여 대사대신 사용을 했으며 또 일반 구매자도 있었으니 김영환의 사업수완 또한 뛰어난 인물이 아닌지 여기서 가수 이정숙은 동료 가수로도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 영화감독 이구영이며 당시에는 몇 명 안 되는 영화감독이며 예술인 가족이었다.

이때 이후부터 노래가 태어나기 시작 한다. 번지 없는 주막은 그 후에 그러니까 레코드업계가 전성시대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백 년설 이 부른 노래들은 거의가 반일 감정이 내포된 노래가 많았다 그래서 일제는 백 년 설을 더욱 감시하는 등보이지 않는 감시를 했던 것이다.

특히 백년설은 지방공연을 가면 그곳에서도 백년설의 일거일동 감시하며 노래 역시 부르는 것을 하나하나 체크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간혹 발생하여 배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일들도 있었으며 일본인들은 어찌 보면 모자라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짖궂은 연예인들은 일본 순사들을 아주 노골적으로 골탕을 먹이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한번은 임검석에 있는 순사에게 술을 한잔 하자고 유인하여 돈 봉투를 만들어서 주고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일들은 공공연하게 있었다. 의례적으로 그 지방에 공연을 가면 초대권과 술값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안 하면은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들만 생긴다. 그러니까 우선 공연을 못하게 함은 물론이요 입장하는 조선 사람들을 하나하나 씩 조사를 하니 극장구경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인사를 할 수 밖에..그날도 순사를 데리고 요정 엘 갔다 그리고 요정에서 술을 잔뜩 먹였다 그리고 방에다가 오줌을 싸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놓고 왔다 그랬드니 그 후부 터는 그렇게 시시콜콜 하질 못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가요인들이 모여 그런 말을 하며 웃는 일들도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 기사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