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에 없는 대전충남史] 희노애락 113년 대전법원…용서·화해의 용광로

18. '법의날' 대전법원·검찰 이야기
1956년 대전시장 횡령사건 대전지법 재판
검사-변호사 치열한 논쟁 방청석은 만원
재판소 직원이던 검사 1948년 대전지검 독립
1968년 고법 유치운동 25년 후 현실화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2-04-24 17:03
  • 수정 2022-04-25 06:06

신문게재 2022-04-2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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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대전 선화동 대전지방법원과 대전지검 모습.  (사진=대전시 제공)
4월 25일은 수사와 기소, 심문을 사또 혼자서 하는 시대를 마치고, 판사와 검사에게 역할을 맡겨 인권 중심의 사법체계가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제59회 법의날이다. 변호사회가 제안해 제정된 이 날은 우리 사회가 법 앞에 평등하게 다스려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권력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국민이 보호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다. 옛 신문에 담긴 대전과 충남·북의 사법 역사를 쫓아가 본다. <편집자 주>

▲대전시 공금횡령 재판

70여년 전 재판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가 있다. 1956년 당시 대전시장은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횡령한 돈으로 모기장을 구입해 대중의 큰 주목을 끌어 연일 보도됐다. 중도일보 1956년 10월 24일자 보도를 보면, 전날 오전 10시부터 문기선 대전지방법원장이 단독 주심을 맡아 심성택 검사 관여로 대전시 공금 횡령사건의 1차 공판이 개정됐다. 이날 법원이 발행한 방청권을 소지한 사람도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법정 방청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기사를 전했다. 재무과장에게 지시해 모 정당에 5만환을 지출하고, 은행에서 인출한 공금 2만환으로 7500만환짜리 모기장을 구입하는 등의 혐의를 받았다. 이때 시장 등 피고를 대리한 변호사는 홍긍식, 임창수, 유헌열, 유진령 등의 6명이었다. 검사가 시장과 재무과장 등 피고인들에게 여러가지 신문하자 변호인 측에서 "아직 기록을 보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문 재판장은 2주 뒤 공판기일을 다시 잡았다고 소식을 전했다. 당시 시장은 그해 12월 불명예 퇴진했고, 1957년 5월 27일 문 재판장은 대전지법 2호 법정에서 1시간 20분 동안 판결문을 낭독한 끝에 기소된 전 시장에게 실형을 선고했다고 보도됐다.



대전법원 전경11
1956년 대전시 공금횡령 사건의 대전지방법원 재판 소식을 전한 기사와 당시 재판이 진행됐을 선화동 대전지법 청사. 대전고법 설치를 촉구하는 1968년 1월 지면.
▲1909년 대전구재판소 출범

대전에 지금의 법원 기능의 재판소가 들어선 것은 1909년 공주지방재판소 관할의 대전구재판소였다. 1914년 4월 8일자 매일신보에 '영선공사' 즉 보수하거나 신축 예정인 곳을 설명하는 기사에서 대전재판소라는 기관 이름이 등장한다. 앞서 1956년 대전시장의 공금횡령 사건의 재판이 진행된 곳은 현재 선화초등학교가 위치한 선화동 84번지이었고, 첫 대전구재판소는 중앙로네거리 NC백화점 자리 선화동 3-14번지에 있었다.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 제도가 시작되면서 충남 홍주(홍성)와 공주, 충북 충주에 그해 재판소가 설치됐고, 이어 강경과 서산, 천안, 제천, 영동에 1909년부터 19010년 사이 재판소가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검찰의 업무를 담당하는 검사와 서기는 판사와 마찬가지로 재판소 직원이었고 검찰 청사는 없었다. 2019년 발행된 '대전지방검찰사'를 보면 대전지검은 1909년 대전구재판소 검사국에서 시작해 재판소 직원으로 재판 기관의 일부로 기능했다. 1948년 8월 법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 조직으로 개편돼 대전지방검찰청이는 기관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법원 청사를 그대로 이용했고, 현재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남지원이 사용 중인 선화동 188번지에 1978년 12월 법원 청사를 신축할 때 함께 이전하면서 검찰 전용 공간을 갖게 됐다.

조성남 전 중구문화원장은 2015년 출간한 '선화동이야기'에서 "1933년 발행된 대전시가지 지도를 보면 목척교 가는 길에 지방법원대전지청이라는 관공서 표시가 있는데 재판소로 불리다가 6·25전쟁 직후부터는 대전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며 "호수돈여고 인근에 담벽과 정원수로 엄숙한 분위기의 저택이 있었는데 법원장과 지검 검사장의 관사로 기억한다"고 기록했다.

1951년 판결문
1951년 대전지방법원의 판결문.  (사진=대전지방검찰사)
▲권력엔 회초리 인권은 증진

충청의 법원은 국가권력과 관습이 국민을 억압할 때 제동을 거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았으며, '미신'과 '반역'으로 비춰지는 오해를 벗겨주었다. 대전지방법원은 195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직원을 선발하는 전형규정을 제정해 그해 3월과 8월 실제로 법원 최초의 서기관과 서기 전형시험을 실시했다. 1970년 8월 대전지방법원 오병선 판사는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경찰서 즉결심판에 회부된 보안사범 3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헌법이 피고인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유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했음에도 그동안 자백만으로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던 즉결심판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1990년 4월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성전환수술로 인한 호적상 성별을 정정하는 신청을 허가했고, 앞서 1989년 7월 청주지법에서도 성형외과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은 신청인이 호적상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경해달라는 신청을 받아들였다. 성전환 수술에 따른 호적 정정을 허가한 첫 사례였다. 1971년 수사권력이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 등으로 사법권을 침해해 사법파동이 빚어졌을 때 "대전지법 판사들도 일괄사표를 제출, 극한투쟁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긴박한 소식이 중도일보를 통해 타전됐다. 1955년에는 상제교 교주가 계룡산에서 심복 교도 36명과 천단을 축성하고 정부를 참징하는 집단을 구성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서울고법과 대법원에서야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대법원은 검사의 항고를 기각하며 "비과학적이며 초현실적인 사항에 관한 것으로서 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전변호사회 고법유치운동

1992년 대전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이 문을 열기 25년 전에 대전에서는 이미 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을 유치하자는 법조와 경제계의 노력이 있었다. 1948년 출범한 대전지방변호사회는 홍긍식, 고의환, 유갑수, 유진령, 유헌열 등이 중심이 되어 변호사계를 꾸렸고, 1962년 기준 회원은 18명이었다. 1968년 1월 중도일보 기사를 보면 "충남·북을 관할하는 고법과 고검의 신설은 1967년 3월 권오병 법무부 장관이 초도순시 때 했던 말"이라며 충청도에서 서울고등법원으로 출석하는 불편한 상황을 전했다. 실제로 대전고법·고검설치추진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져 대전변호사회 홍긍식 변호사와 대전상공회의소 이웅렬 회장, 박길중 도정자문위원장 등으로 구성된 추진위는 1968년 12월 국회에 대전고법·고검 설치 청원을 냈다. 서울까지 왕래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어 항소권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아져 지역민들의 인권옹호를 위해서라도 고법 설치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해 4월 25일 대전고법설치 법률개정안에 포함돼 여야의원 78명의 발의로 국회에 상정됐으나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대전시 인구는 31만명으로 대구 88만명, 광주 43만명에 미치지 못했고, 25년을 기다려서야 지금 모습의 사법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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