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 저수지 모습 |
찌는듯한 무더위로 시달린 지가 어제 같은데, 도로 양편 가로수에 푸르름이 가시고 나뭇잎이 비를 맞아 처연한 모습으로 떨어지며 신작로에 뒹군다.
여행은 역시 국도로 다녀야 주변의 풍광도 즐기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쓸쓸한 생각이 들어 음악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자는 생각으로 핸드폰 속의 블루투스이어폰을 꺼내 귀에 넣고 핸드폰 유튜브에서 가을에 듣기 좋은 노래를 찾아 틀어 놓고 떠났다. 잔잔한 가을 노래를 27곡 정도 들었을까? 천년 동안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징검다리가 되어 준 농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진천 농다리 모습 |
농다리 동편의 작은 산줄기(살고개)만 넘으면 강줄기와 바로 연결되어 마을들을 이어주는 소로와 통했다. 1932년 발행된 향토지 『상산지(常山誌)』 [조선환여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초 임 장군이 축조하였다'고 기록돼있어 천여년 세월을 버텨온 돌다리라고 한다.
작은 돌을 물고기의 비늘 모양으로 쌓은 후 지네 모양을 본떠 28칸을 늘여 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살고개 일원에 미르숲 공원이 조성돼 있고 산책로와 하늘다리를 통해 근근이 옛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6세기 중엽 신라는 고구려 영역이던 지금의 진천(鎭川)을 차지하고 이곳에 만노군(萬弩郡)을 설치했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595~673)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 564~?)을 태수로 보내게 됐는데, 김서현은 일찍이 지증왕의 손자이자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공주(萬明公主 , 574~?)를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거치지 않고 야합해 만노군(萬弩郡)으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해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김유신은 지금의 진천인 만노군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의 탄생지와 태(胎)를 묻은 태실(胎室)이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성의 정상부에 있으며 자연석을 둥글게 기단으로 쌓고 주위에 돌담을 쌓았다. 어쩌면 김유신은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 충청도 사투리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황산벌'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은 영화 중반까지 정체불명의 백제말, '거시기'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전전긍긍하지만, 결국 계백과 장기를 두며 거시기의 뜻을 파악하고, 비가 오는 날 투석기로 찰흙을 투척하는 전략을 통해 백제군을 격파한다. 이게 상당히 아이러니한데, 김유신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 충청도다.
어쩌면 충청도 사투리에 익숙할 법도 한데…그러나 아무리 같은 충청도라 해도 진천과 부여의 거리감에서 오는 사투리 차이는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농다리를 오가다 뒤편에 숨은 듯이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진 초평저수지로 향했다.
초평 저수지 모습 |
아름다운 초평 저수지 주변에는 붕어마을이 있다. 이 붕어마을에 민물고기집들이 많이 있는데, 필자는 여러 집 중 '백년가게', '대를 이은 맛집'이라는 패가 붙어 있는 '단골집(충북 진천군 초평면 초평로)을 찾았다. 이 집은 비록 '백년가게'라는 패가 붙어 있지만, 대를 이은 집은 맞고 약 34년 정도 된 집이라 했다. 백년 그 이상 맛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붕어찜 1인분을 시켰다.
단골집의 붕어찜 상차림 |
붕어요리 중에서도 붕어찜은 일찍부터 유명하여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와 『규합총서(閨閤叢書)』 등의 문헌에 붕어찜 만드는 법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큰 붕어를 통째로 비늘을 거슬러 칼로 등마루를 째어 속을 내고 어만두 소처럼 만들어 뱃속에 넣고 좋은 초 두어 술을 붓고 고기 입속에 백반(白礬) 조그마한 조각을 넣고 녹말을 생선 베어 구멍난 데 묻혀 실로 동여, 노구에 물을 자그마치 부어 만화(慢火:뭉근한 불)로 기름장에 끓이되 밀가루와 달걀을 푼다"고 돼 있다.
이처럼 붕어찜 맛은 필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이 까다로운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도 그 맛을 인정했다. 도제조 서명균(徐命均)이 "붕어찜 같은 것이 혹시 입맛에 맞을 재료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붕어찜이 맛있기는 하지만 나는 평상시 즐기지 않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라 정조(正祖)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도 붕어찜을 올렸다. 『일성록(日省錄)』
이처럼 붕어찜은 왕의 수라에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 관아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즐겨 먹는 보양식이다. 원안(延安)의 한 원님은 찐 붕어를 몹시 좋아해 하루에도 3·4차례 올리면 그때마다 비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웃으며 청사(廳舍) 벽에다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했는가,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네." 하였고, 별호를 붕어총 즉 붕어 무덤이라 했다.
붕어찜 |
주문한 지 불과 20여분이 되니 붕어찜이 나왔다. 붕어찜 위에 양념이 배인 시래기와 잘 익은 얇은 조각 무 그리고 쫀득하고 얇게 빚은 수제비가 잘 어우러져 있고, 맛은 민물고기 특유의 흙내를 비롯한 잡내가 전혀 없다.
붕어찜 먹을 때 잘못하면 억센 가시 때문에 목에 걸리기도 하는데, 젓가락과 손가락을 적당히 이용해 살을 발라내면서 먹으면 가시 염려는 안 해도 될 만큼 잘 발라진다.
발라낸 붕어 살과 시래기를 함께 입에 넣으니 구수한 감칠맛이 어금니 밑의 침샘을 자극한다. 붕어찜의 붕어 한 마리를 알뜰하게 먹고, 시래기와 양념을 싸달라고 하니 포장을 해 줘 집으로 가져와 두 끼는 붕어찜 양념으로 해결했다.
단골집 1대 할머니께서 수제비 반죽을 치대는 모습 |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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