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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샌들과 슬리퍼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신성룡 기자

신성룡 기자

  • 승인 2021-03-15 09:09
  • 수정 2021-06-2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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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십 년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때가 여름인지라 앞뒤가 뚫린 샌들을 신고 귀국 인사차 은사님 연구실을 방문했다. 1994년 8월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서 연구실을 나가려는데, 은사님께서는 뜻밖에도 내 샌들을 지적하셨다.

"김 선생, 학교에서는 앞뒤가 닫힌 신발을 신으세요." 발가락과 뒤꿈치가 훤히 드러나는 내 샌들이 못내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학교에서는 정장이 예의고, 샌들은 정장이 아니라는 규범이 통용되던 때다. 어떤 분은 내가 입은 청치마도 문제 삼았다. 청치마는 부적절한 강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여교수가 신는 샌들이나 청치마를 문제 삼을 사람은 없다.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괜찮은 것이다.

규범은 시간이 흘러 변화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유동적이다. 1990년대 미국의 교수들은 강의할 때도 청바지는 물론이고, 여름엔 샌들에다 반바지 차림도 종종 있었다. 우리에겐 문제였지만 다른 공간 속 그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때 절대적으로 보였던 규범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고, 어느 특정한 공간에서 절대 준수를 요구하는 규범도 공간이 바뀌면 함께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모든 규범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문화적으로 특정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구성물일 뿐이다. 즉, 요새 말로 규범은 자의적(arbitrary)이고 우연적(contingent)일 뿐,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고국 생활에서 당시 나의 적응을 염려했던 두 분의 충고를 나는 잘 따랐다. 학교에 올 때는 샌들을 신지 않았고, 청치마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규범의 자의성과 우연성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당시 문화가 요구하는 규범을 따랐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른다는 심정이기도 했지만, 실은 내 맘대로 하기엔 당시 나의 입지가 불안했던 탓이 컸다. 전략적 준수였다. 규범을 새로이 주조하는 선구자의 길은 고단하니, 두어 발짝 발걸음을 늦추는 것이 두루 편하다는 영리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복장 규범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윤리와 도덕률도 마찬가지로 역사/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약속들이다. 교통법규와 비슷하다. 교차로에서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녹색 불이 켜졌을 때 움직이는 것은 색깔이 지니는 내재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자는 우리 간의 자의적인 약속을 따르는 것이다. 약속의 위반은 교차로의 원활한 교통을 막을 터이니, 원활한 교통을 위해서 우리는 약속을 지킬 뿐이다. 약속이 절대적이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잠정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나는 규범의 절대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편의상 대체로 규범을 따르는 편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번엔 샌들이 아니라 슬리퍼가 문제였다. 누군가는 학생들이 슬리퍼 신고 수업에 오는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를 가정교육의 문제로 분석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왜냐면 우리 집 막내가 이름하여 '슬파족'이기 때문이다. 조상 탓에 발등이 높은 막내는 어떤 신발도 불편했기에 어딜 가든 웬만하면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그런 막내를 가끔 타박하긴 했지만, 신체조건 탓이니 많이 타박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다니,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샌들이든 슬리퍼든 뭐가 문제에요? 슬리퍼 신었다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나요? 강의실에서 슬리퍼는 틀렸다는 기준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일 뿐이라고요! 슬리퍼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마구 반박하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했다. 강의실 슬리퍼의 부적절성은 지금 여기 합의된 공중도덕이라는 주장을 나 혼자 함부로 부정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한 번쯤 비판 기준의 절대성을 먼저 의심해보겠노라 생각했다./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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