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릉원 3호분 조사 후 전경 (사진=문화재청)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릉원 3·4호분(충남 부여군 능산리 산15-5)에 대해 2021년부터 올해까지 봉분 조사를 진행해 경관복원을 위한 입지 특성과 고분의 구조, 축조과정을 확인했으며, 조영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자료도 확보했다고 23일 밝혔다.
부여 왕릉원은 백제의 사비 도읍기인 538~660년까지 123년간 재위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발굴 조사지인 부여 왕릉원 3·4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각각 한 차례씩 조사한 바 있다. 하지만 도굴갱을 타고 돌방(석재를 쌓아 만든 무덤의 매장시설)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놓인 유물을 수습하고, 돌방 내외부 사진과 실측도면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특히 고분 조사에서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봉분과 돌방의 관계, 봉분 흙의 종류, 조사 당시 주변 지형 등에 대한 면밀한 기록이 없었다. 1971년 부여 왕릉원 일대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까지 진행된 탓에 본래 경관도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이번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중앙고분군에는 서쪽과 동쪽에 두 개의 능선이 있었다. 3·4호분은 서쪽 능선에 위치하며 동쪽의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나머지 고분들이 위치하는 모습이다.
고분의 구조와 축조과정은 고분을 조성할 위치에 돌방의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직경 20m 내외의 봉분을 구획했다. 당시 경계지점에 고분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높이 40㎝, 너비 25㎝ 내외의 다듬은 돌(호석)을 세우고 내부에 봉분을 쌓았다.
돌방은 당시 생활면에서 4.5m가량을 굴착해 평면 '凸'자 형의 구덩이를 조성했는데,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의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여서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구조다. 돌방은 잘 다듬은 판석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봉분은 돌방 천장을 기준으로 3.5m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하고 출입구에는 판석을 막아두고 널길(무덤의 입구에서 시신을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은 흙으로 채운 뒤 고분 외곽의 호석을 연결했다.
3호분과 4호분은 기본 축조과정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차이가 있는데, 3호분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았지만, 4호분은 수평으로 쌓았다. 또 3호분에서는 돌방의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널길의 배수로(너비 60cm, 최대 깊이 100cm) 등이 확인됐지만, 4호분에서는 추가 시설이 따로 확인되지 않았다.
고분 조영 시점을 알 수 있는 유물도 확보했다. 4호분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형태의 목관 장식금구(裝飾金具)가 확인됐는데, 익산 쌍릉 출토품과 모양이 동일했다. 3호분에서는 호석열(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돌을 이용해 만든 시설물)의 석재 사이에서 암키와 편, 널길 채움토에서 연화문수막새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부착하는 기와로 끝단의 전체에 연꽃 문양이 찍혀 있음) 조각이 확인됐다. 이 기와들은 모두 백제 시대 절터인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고분 조영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은 10월 25일 오후 2시에 부여 왕릉원 3·4호분 발굴조사 현장도 공개할 예정이다.
정바름 기자 niya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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