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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2-광천 호박 먹인 미꾸라지 어죽(魚粥)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정바름 기자

정바름 기자

  • 승인 2023-11-06 09:32
  • 수정 2023-11-06 14:48

신문게재 2023-11-0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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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 '광천원조어죽' 식당의 미꾸라지 어죽
요즘 단풍이 제법 붉게 물들어 가을을 실감케 한다. 가을하면 생각나는 보양식 추어탕이 생각이 난다. 이 추어탕을 고려 때는 일반 서민만 먹었던 것 같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며 '미꾸라지'가 나온다. 그리고 조선 정조시대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 '피호(陂湖)와 강해(江海)에 미꾸라지와 갈치를 잡으려고 어량(魚梁)을 만들어놓은 것 등'이라며 미꾸라지를 잡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그가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유관현(柳觀鉉, 1692~1764)은 성품이 검약(儉約)하였다. 그는 벼슬살이할 때 성대한 음식상을 받고는 "시골의 미꾸라지찜만 못하다"고 하였고, 기생의 노래를 듣고는, "논두렁의 농부 노래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이때 이미 미꾸라지로 찜을 해 먹었던 것이다.

이 미꾸라지찜이 오늘날의 추어숙회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추어탕과 추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우선 서울의 추탕은 통 미꾸라지를 넣고 끓이고 영호남의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갈아서 끓인다. 추어탕과 추탕의 차이는 그 지역과 태생에서부터 다르다. 추탕은 서울 즉 한양 성안의 '꼭지'라는 거지 조직에서는 미꾸라지를 잡아 끓여 먹었다. 이들 거지 조직은 옛 동대문운동장 터인 동대문디자인파크플라자 자리에 있던 가산(假山, 가짜 산)이 본영이었다.



서울 한복판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淸溪川)은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을 거쳐 성 밖으로 흘러나간다. 이 두 수문(水門) 사이로 삼각주가 있었다. 세종대왕이 물난리를 자주 겪는 청계천의 석축 공사와 영조 36년 20만 명의 인부를 동원 청계천의 이곳에서 파낸 모래를 청계천 6가에서 방산동에 이르는 양 둑에 인공적으로 산처럼 쌓아 놓아 가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가산은 한양 거지들의 집합소가 되고 본영이 됐다. 거지들은 주인 없는 가산에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살면서 얻어먹고 있었기 때문에 거지를 일명 '땅꾼'으로 부르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땅꾼'은 오늘날 땅속에 있는 뱀을 잡아서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뱀잡이'와 비슷한 말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 땅꾼은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던 거지를 이르는 '고유명사'였다고 한다.

한양 거지의 대본영(大本營) 가산을 중심으로 대문 안에 광교지영(支營), 수표교지영, 복청교지영, 대문 밖에 서소문지영, 새남터지영, 만리재지영이 있어 개천의 다리 밑에 거적을 이용해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성종은 거지정책을 바꿔 이들을 조직화해 한 해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깡이 세고 통이 큰 꼭지(거지) 두목(꼭지딴)을 뽑아 이들의 생살권(生殺權)을 주고 기강을 잡게 하면서 생계를 보장해 줬다. 옛날 궁중에서 쓰는 약을 맡아보는 내의원이나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 주던 혜민서(惠民署) 같은 곳에서 부탁을 받고 뱀이나 지네 등 약으로 쓸 동물이나 곤충을 잡아 오는 일을 하거나 잔칫날이나 장례식 때 궂은일을 도맡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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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먹인 미꾸라지
한편 옛날 한양에는 거지 집단 조직에는 '꼭지 오륜(五倫)'이 있었다. 덕(德)-부모를 일찍 여읜 집은 밥을 빌지 않았으며, 인(仁)-과부나 홀아비가 사는 집에는 구걸하지 않았다. 의(義)-밥을 잘 주는 집에 초상이 나면 자청해 상여를 메는 것으로 지켰다. 신(信)-서로 약속된 걸식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으며, 예(禮)-두목의 직계 존속이 죽으면 3년간 심상(心喪)을 입었다,

특히 구걸할 수 있는 허가 조건으로 절대 밥은 얻어 오되, 건건이(반찬)는 얻어 오지 않도록 한 것이 아마 당시도 식중독 사고를 염려해서 취한 조치인 것 같다. 반찬을 얻어 올 수 없는 관계로 거지들이 밥을 얻으러 간 사이 남아 있는 거지들은 청계천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탕을 끓이는데,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파와 마늘은 물론 잡다한 재료를 모두 쓸어 넣고 추탕을 끓여 구걸해온 밥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시 추탕집은 포도청에서 뒷돈을 대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추탕 끓는 냄새가 얼마나 구수했던지 일제강점기에 이 추탕을 '꼭지딴 해장국'이라 부르며 청계천 주변 상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사 먹었다고 한다.

1920년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추탕집은 화동정(花洞町 막바지 황추탕 집이었다. 황추탕집은 여름에는 영업하지 않았다. 1927년 황추탕집이 영업을 개시하는 날 잡지 『별건곤(別乾坤)』의 기자는 이틀간 '추탕집 머슴체험'을 한다. "秋(추) 8월 그믐께 서늘 바람나고 더위 물너간(물러간) 바로 끗치요(끝이요) 녀름(여름) 내 휴업했다가 이 가을철이 잡어 들어오자(돌아오자) 다시 개업한 바로 첫날이엇습니다. 가을 오면 아마 이 추탕(미꾸리탕)을 퍽이나 그리워하는 모양 같습니다."

황추탕 집은 화동(花洞)에서 지금의 종로문화원 앞 부근 송현동(松峴洞)으로 이사해 장사를 했다. 1927년 10월 1일 『별건곤(別乾坤)』(9호) 1930년 동대문 밖에 황추탕집에 견줄 만한 '형제주점'이 영업을 시작한다. 199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정도 600년 서울 재발견'이라는 기사를 보면 "형제추탕집은 1920년대 말 종로 5가에서 이사 온 선산 김씨 다섯 형제가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당시는 경기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 옆에 문을 연 노포였다. 처음에는 옥호 없이 막걸리와 추탕을 팔았는데 주위에서 형제추탕집으로 부르자 1930년대에는 유명추탕 형제주점이란 간판까지 달게 된다. 이 형제추탕집은 6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

형제주점은 등장하자마자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유명해진다. 1940년대 후반 형제주점은 신문에 대대적 광고를 할 정도였다. 1960년대 대학생들은 주로 신설동 '형제주점'에서 추탕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형제주점에서 일한 정부봉씨가 1930년 가을 독립해 신설동 추탕집을 낸다. 가게 이름도 없이 시작했지만 주인 얼굴의 특징을 따라 자연스럽게 '곰보추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7년 3월 18일자 '경향신문'은 '곰보추탕'에 대해'자연산 미꾸라지에 양지머리 고기와 늙은 호박, 버섯, 유부 등 모두 15가지의 재료를 넣어서 추탕을 만들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서울 보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한 수필가 윤오영(尹五榮, 1907~1976)이 동대문 인근을 배경으로 한 '방망이 깎던 노인'에 나오는 수필 내용을 보면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추탕을 안주로 탁주를 마셨던 것 같다.

시청 뒤 코오롱 빌딩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서 3·4번째 골목 한옥에 위치한 '용금옥'은 1932년 신석숭 옹이 안식구인 홍기녀 씨와 주점 겸 추탕집으로 시작해 추탕 맛이 장안에 소문이 나자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당대의 정치인, 언론인, 문인,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60년대 서울식 추탕에는 유부와 추두부가 들어가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육개장과 비슷한 진국에 물기를 흠뻑 머금은 유부의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미꾸라지를 통째 넣고 끓인 추탕은 소 내장을 넣고 끓여낸 육수 때문인지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데 미꾸라지와 쇠고기 육수의 맛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옛날 시골에서는 입동(立冬)이 되면 마을 단위로 치계미(雉鷄米)행사를 열었는데, 치계미(雉鷄米)는 꿩 + 닭 + 쌀을 말한다. 이 치계미(雉鷄米)는 사또 밥상에 오를 찬값이라는 뇌물을 뜻하였는데, 마치 마을의 노인들을 사또처럼 대접하려는 데서 기인한 풍속인 것이다.

또 옛날에는 춘추(春秋)로 양로잔치를 베풀었는데, 특히 입동(立冬), 동지(冬至), 제석(除夕)날에 일정 연령이상의 노인들에게는 치계미(雉鷄米)라 하여 선물을 드리는 관례가 보편화돼 있었다. 비단 논 한 뙈기, 밭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집에서도 일 년에 한 번은 마을 노인들을 위해 응분의 출연(出捐)을 했다.

한편 동네 어른들에게 치계미(雉鷄米)를 모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입동 무렵 미꾸라지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도랑에 숨는데, 논두렁을 치며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鰍魚湯)' 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는 ‘도랑탕 잔치’로 대신하는데, 이를 ‘상치(尙齒)마당’이라고도 했다.

이 상치(尙齒)마당은 입동을 맞으며 추워지는 날씨, 주변에 어려움을 더해가는 노인들이 있는지 살피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는 치계미(雉鷄米) 행사였다. 요즘 꿩 찾기가 어려워 치계미가 부담스럽다면, 주변 어른들과 함께 추어탕 한 그릇이라도 하면 추운 겨울, 모두의 마음이 따뜻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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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의 광천원조어죽
그런데 충남 홍성 광천에 추탕도 아니고 추어탕도 아닌 '미꾸라지 어죽'이 있다고 한다. 식생활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의문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주 '맛있는 여행'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광천원조어죽(충남 홍성군 광천읍)'집을 찾았다.

그런데, 막상 음식을 대하고 보니 굳이 묻지 않아도 왜 추어탕이라 하지 않고 어죽(魚粥)이라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추어탕은 밥과 곁들여 나오는 국[羹] 또는 탕(湯 ) 형태로 나오지만, 이 집은 탕 안에 국수를 넣어 은근한 불로 걸쭉하게 끓이다 국수를 건져 먹고 밥을 넣어 볶아 먹는 형식으로 추어탕이 아닌 어죽이라 불리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우선 미꾸라지 종은 미꾸라지와 미꾸리가 있다. 한문으로는 미꾸라지를 추어, 미꾸리는 이추라고 하며,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구별이 어렵지만 생김새를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미꾸리는 몸통이 약간 둥글기 때문에 동글이, 미꾸라지는 세로로 납작해서 납작이라고 한다. 미꾸라지는 미꾸리보다 수염이 더 길다. 미꾸라지는 1년 정도, 미꾸리는 2년 정도 자라야 추어탕용으로 가능해서 양식은 주로 미꾸라지를 선호하고 있다.

이 집 미꾸라지는 일반 미꾸라지와 다르다. '호박먹인 미꾸라지'다. 미꾸라지는 보통 강이나 호수 아니면 논바닥 뻘 속의 생물을 잡아먹고 사는 잡식(雜食)이다. 그런데, '광천원조어죽'집 창업자인 김동춘 할머니는 친정아버지가 직접 잡아 끓여 주던 어죽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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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먹인 미꾸라지 어죽
김 할머니 친정아버지가 끓여 주던 '미꾸라지어죽'은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내나 흙내가 전혀 없고 오히려 담백하고 단내가 났다.

그 비결은 늙은 호박에 미꾸라지를 넣고 사나흘 동안 있으면 미꾸라지는 그동안 호박을 먹으면서 그동안 뻘 속에서 먹었던 이물질을 배설해 깔끔한 맛을 낸다.

이렇게 호박 먹인 미꾸라지를 끓는 물로 데쳐서 체에 거른 후 소머리 육수를 넣고 푹 고은다. 이렇게 고아 걸쭉한 미꾸라지 육수에 국수를 넣고 뭉근한 불로 끓여 가며 먹는 미꾸라지 어죽은 보양식 중의 보양식이며, 맛 또한 진하고 담백하다.

이 집 역시 혼자 가면 어죽 맛을 볼 수가 없다. 최소 인원이 2인 이상이다. 필자 역시 2인분을 시켜 먹고 아까운 보양식을 남겨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1990년 개업한 이래 30년 넘게 한자리에서 영업 중인 노포인 이 집은 추어어죽 이 외에도 소머리수육, 추어튀김, 돼지족발 등도 판다. 특히 돼지족발의 생김새는 족탕에 들어간 족발과 비슷하다. 하얀 족발 위에 고춧가루 등을 뿌려 나오는데, 특제 양념에 찍어 먹으면 또 다른 별미다.

/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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