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며

연극 '목소리'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 승인 2024-08-01 16:59
1인극
연극 '목소리' 포스터.
게릴라성 호우가 쏟아지며 폭염이 몸을 짓누르던 지난 7월 20일 오후 5시 3분. '날개 없는 언어에 깃털을 심어 경계선이 없는 소통으로 관객과 무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극단 <헤르메스>의 여성 1인극 <목소리: 각색·연출(서경동)>를 제대로 냉방이 된 소극장 <고도>에서 보았다.

무대는 모두 4각의 의자, 옷장, 침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전부다.

'한 여성'이 극도로 절제된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부유(浮遊)하고 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 미세한 손의 떨림으로 '전화기'를 잡고 사랑과 이별 그 어디즈음에서 방황하는 삶과 죽음의 지점을 다성(多聲)적 목소리로 60분을 살아내고 있다. 장 콕토 원작의 원 보이스(one-voice) 독백극 <목소리>가 그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한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수화기를 통해 마지막 이별의 대화를 시작한다. 끝도 없이 "여보세요"를 외쳐대며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을 고백하지만, 전화 속 목소리는 계속 '혼선(混線)'을 일으키는 듯 불안정한 감정의 진동 운동을 반복한다. 그녀는 이별 앞에서 '정서의 폭'은 극으로 치닫고 사랑과 미련, 집착을 끊어내지 못한 채 닿지도 못하는 목소리로 이별의 시간을 붙잡아 두려한다.

게다가 무대 속 '한 여자'의 목소리는 이별의 결단을 유보한 채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파르마콘(pharmakon)의 목소리'로 울린다. <이별> 앞에 선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기도 하고, 자신인데도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자신의 의지와 결핍이란 틈새 사이에 '불필요한 자기'를 끼워 넣기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으로 자신이 '가짜'가 되거나 '진짜' 되기를 반복하는 입체적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한편 이 작품 속 <목소리>는 관객들과 타협하지 않고 속화(俗化)되기 쉬운 이별의 순간을 맛보게 하고, 슬픔과 공허와의 싸움터로 데려가기도 하며, 한편 단순한 한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실존적 심연을 향한 비명소리로 듣게 한다, 급기야 '한 여성'은 연인이 다른 사람을 영원히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고 걸어보지 않았던 '빈 사랑의 무대'를 체험케 해준다.

작품 속에서 줄곧 소품으로 등장한 '전화'는 관계 속에서 현실에 관한 자신의 생각, 감정을 탐구하거나 '한 여자와 연인'의 과거, 꿈같은 것을 연결하는 극적 도구로 쓰인다. 즉 '전화 속 두 명의 인간은 변조된 정보가 떠다니는 상황 속에서 '얼굴 없는 복제된 감정을 나눈다, 더 나아가 나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발동시켜 둘 사이의 균열과 뒤틀림을 반영하거나 다른 한쪽을 조정하려는 '이별 없는 동시대인'의 초상(肖像)으로 작용 한다.

60분 동안 다면체적인 멀티-톤으로 '한 여자'를 연기해 낸 젊은 여배우(문혜인 분)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가능성과 패기는 무대 자체였다. 그녀는 605 마디의 극적 비트(bit)를 때론 잘 정제된 부드러운 몸짓에 실어 나르고, 때론 다양한 빛깔과 냄새를 풍기는 대사연기 속에서 의미적 동선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관객들에게 젊은 연극인에게 실험과 시도는 필수임을 함께 보여준 고마운 기회였다.

이 작품의 각색 작업의 주체가 연출자이기에 흔히 말하는 '어렌지(arrange)'의 영역을 뛰어넘어, 이별의 아픔을 겪는 한 여성이 극복해야 할 주체적 붕괴와 독립성, 혹은 새로운 주체의 모색이라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다. 작품의 제작환경이 열악해지면서 공동체 문화가 깨질 수 있다는 지적과 연극의 규모와 수준이 왜소화될 위험이 된다는 모노 고백극의 우려를 분식(扮飾)시켜 줄 것이다.

김충일 연극평론·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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