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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병원밥 맛있어요?

우난순 기자

우난순 기자

  • 승인 2025-03-26 17:44

신문게재 2025-03-27 18면

뭇국
"여기 병원밥 맛있어요?" 수술 후 살을 봉합하는 의사에게 물은 첫마디였다. "글쎄요. 입맛은 주관적이라서. 저는 먹을 만하던데요." 또 사고를 쳤다. 이번엔 손목 골절. 보문산에 갔다가 빙판길에서 넘어졌다. 어려서부터 사고뭉치였는데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다. 덕분에 몸에 훈장 하나 새겼다. 수술은 일정상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가 집도했다. "아이고야!" 집도의는 뒤틀린 내 손목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수술실은 목공소 같았다. 망치로 탕탕 두드리고 조이고. 수술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장막이 쳐져 있어 보이지 않는 의사를 상대로 수다를 떨었다. 손목이 부러지고 멘붕인 상태로 회사 옆 병원에 달려와서 수술이 끝나기까지의 하루가 한 달 같았다.

붕대로 칭칭 감은 오른손을 걸개로 받치고 입원실로 올라가면서 개선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아, 또 새로운 경험을 했구나.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해보자는 게 내 신조다.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거니까.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처럼 배가 고팠다. 아침에 찐계란, 사과, 바나나 이후 아무것도 못 먹었다. 드디어 저녁밥이 나왔다. 밥, 국, 반찬 네 개. 링거를 주렁주렁 매달고 왼손으로 허겁지겁 먹었다. 양손을 다 쓰기 때문에 왼손으로 먹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밥 한 톨, 반찬 하나 안 남기고 싹 비웠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들판이 이럴까. 언니가 사온 김밥도 마저 먹었다.



입원기간 하루 일과가 링거 맞고 약 먹고 소독하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밥. 병원밥은 간이 심심해서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매 끼니 국과 반찬이 다르고 단백질 음식도 꼭꼭 들어갔다. 밥이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양도 일꾼이 먹는 고봉밥이었다. 소고기뭇국에 숙주나물볶음, 돼지고기 장조림, 오리고기, 김치. 계란국이 나올 때도 있고 오이무침, 소불고기, 감자채 볶음 등등. 영양학적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야말로 건강식이었다. 시계를 보며 밥먹을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와 같은 병실을 쓰는 아주머니는 입맛이 없다며 한두 술 뜨고 식판을 물렸다. 그러곤 과자나 빵 같은 걸 먹었다. 다른 병실 젊은 여자는 남편한테 매운 닭발을 사오게 했다나?

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의 '귀여운 여인'은 현대판 신데렐라 영화다. 콜걸이 백만장자를 우연히 만나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하는. 개봉당시 대히트했다. 이 영화엔 최고급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조식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식탁엔 먹음직스런 빵과 팬케이크, 과일, 주스, 우유 등이 고급진 그릇에 담겨 있다. 톱톱한 목욕가운을 입은 줄리아 로버츠가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리처드 기어를 수줍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빵 하나를 집어 뜯어 먹는다. 영화 본 후 로망이 생겼다. 호텔에서 하얀 목욕가운 입고 조식 먹는 거. 비록 병상에서 환자복 입고 식판에 담긴 백반을 먹지만 5성급 호텔 룸서비스라고 상상했다.

처음 병원에 와서 주치의한테 작년엔 발목을 접질려 4개월 고생했는데 이번엔 손목을 다쳤다고 한탄하자 의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생길 수 있는 거 아니냐." 의사의 이 한마디가 위로가 됐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수술 후 무통주사도 안 맞았다. 의사가 놀라워했다. 의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는 환자에게 큰 힘이 된다. 의료대란 이후 환자들의 응급실 뺑뺑이가 다반사다. 제 밥그릇 챙기는 의사들과 정부의 미숙한 정책 탓이다. 하지만 어딘가엔 인술을 베푸는 의사도 존재한다. 연봉 4억을 포기하고 시골의사가 된 임경수 정읍 고부보건소장. 열악한 농촌지역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어 아예 눌러앉게 됐다고. 환자들에게 이런 의사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그래서 병원밥이 더 맛있었나?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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