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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직지 이후, 이제는 동몽선습… 인성교육으로 유네스코를 두드리다

민병찬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민주평통 대통령자문위원

방원기 기자

방원기 기자

  • 승인 2025-12-09 10:38

신문게재 2025-12-10 19면

민병찬
민병찬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입시 경쟁과 성취 중심의 교육 속에서 인성교육은 늘 '나중에 해도 되는 것'처럼 밀려나 있다. 학교에서는 점수와 스펙이 우선이고, 가정에서는 바쁜 일상 탓에 가치와 규범을 나누는 대화가 줄었다. 디지털 공간에서 아이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연결되지만, 책임과 배려, 공감의 언어는 오히려 사라져 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교육이 인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막연한 구호만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속에는 이미 480여 년 전, 사람다움을 기르는 교육을 체계적으로 설계한 교과서가 존재했다. 조선 중기 문신 입암 민제인 선생이 1543년에 집필과 편찬한 『동몽선습』이다. 흔히 한문 기초 교과서로만 알려져 있지만, 효와 오륜, 일상의 태도와 역사 인식을 한데 묶어 아동의 인성을 기르는 통합 교육과정으로 설계된 책이다. 후반부에는 단군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 흐름까지 간결하게 정리해 공동체 정체성을 함께 가르친다. 서구의 근대 교육사상가 코메니우스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서 "어떤 사람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셈이다.



필자는 입암 선생의 14대손이자 공학자이다. 평생 인간·생체공학을 연구해 왔지만,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성의 피폐와 혐오의 확산을 목격하며, 물질문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절감해 왔다. 그 문제의식 끝에 '동몽선습'의 교육철학을 현대 인성교육의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을 영문으로 작성했고, 올해 스코프스(SCOPUS) 등재 미국에서 출판하는 국제저널에 게재하는 결실을 얻었다. 한국의 고전 교과서가 "세계 최초의 체계적 아동 인성교육 교재"라는 잠재적 가치를 국제 학계에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작업이었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유럽과 아시아 연구자들은 동서양 인성교육 전통을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직지,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의보감, 4·19 혁명 기록 등 20건의 기록유산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바 있다. 금속활자, 문자창제, 왕조의 기록,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정신사와 제도, 민주주의의 여정을 보여 주는 귀한 사료들이다. 이는 문자와 제도, 민주주의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 자산이 인류의 유산으로 공인받았다는 뜻이다. 이제 '동몽선습'을 통해 "사람을 어떻게 가르쳐 왔는가"라는 교육의 역사까지 세계와 나눌 차례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이야기를 현재와 미래 세대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16세기 조선의 교과서를 오늘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는 없다. 신분제와 가부장제, 집단주의의 한계는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효와 오륜이 지향했던 책임, 존중, 배려, 공동체 의식은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될 수 있다. '동몽선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지금도 유효한 가치를 추출해 현대 인성교육의 설계 원리로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교육 현장을 바꾸는 지금이야말로, 어떤 인간상을 목표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철학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그 작업은 더 이상 개인 연구자의 열정에만 맡겨둘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직지와 조선왕조실록이 그랬듯이, 이제는 국가와 지자체,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 원문과 번역본을 정본으로 확정하고, 다국어 번역과 주석,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며, 가정·학교·사회에서 활용 가능한 교육 모형을 실험해 보는 국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교육부와 문화재청,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동몽선습'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국내외 학술 교류와 국제 심포지엄을 꾸준히 열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야 비로소 '동몽선습'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현실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유네스코 등재는 단지 또 하나의 타이틀을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고, 어디를 향해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 왔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세계와 함께 나누는 선언에 가깝다. 물질의 속도가 정신의 속도를 앞지르는 시대일수록,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에 대한 선조의 고민을 다시 꺼내 들고, 국가가 책임 있게 계승·발전시키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동몽선습'을 세계에 묻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민병찬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민주평통 대통령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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