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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카르페 디엠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임병안 기자

임병안 기자

  • 승인 2025-12-09 16:55

신문게재 2025-12-10 18면

백향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연말은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철학적인 절기이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해 동안의 일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어떤 일은 먼 옛날 일 같은데 일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일년이나 되었네 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에 대한 느낌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그래서 모든 일이 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연말은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해서 날씨가 주는 특별한 계절의 정서가 함께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아버지로, 대지의 신 가이아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12티탄 중의 막내이다. 어머니 가이아를 도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왕위에 오르지만 크로노스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저주의 신탁을 받는다. 크로노스는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 버린다. 크로노스의 아들로 태어난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가 돌을 강보에 싸서 크로노스가 삼키게 해서 목숨을 건진다. 몰래 자란 제우스는 결국 올림푸스의 왕이 된다. 자식을 삼켜 버리는 크로노스는 그래서 모든 것을 없애 버리는 망각의 시간, 모든 것이 흘러가 버려서 사라지는 시간을 상징한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진다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잡아 먹힌다는 것, 이것은 직선적 시간, 되돌아 오지 않는 물리적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내 아들이다. 그는 독특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의 앞부분은 머리칼이 덥수룩하게 나 있지만 뒤통수는 머리카락이 한올도 없는 대머리이다. 양쪽 어깨에는 큰 날개가 달려 있고 양 발꿈치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 있다. 한쪽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쪽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카이로스는 커다란 공같이 생긴 물건을 타고 다니는데 정해진 직선을 일정한 속도로 지나는 것이 아니고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여 다닌다. 앞머리는 무성해서 잡으려 하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무성한 머리칼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보기 어려워 놓치기 쉽다. 한번 지나가면 뒤따라가 잡으려 해도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대머리이기 때문에 잡기가 어렵다. 발 뒤꿈치에까지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카이로스는 포착해야 하는 시간, 순간적으로 의미를 알아차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의 또 다른 이름은 '기회'이다. 왼손에 들고 있는 저울은 모든 일을 정확히 분별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것이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은 날카롭게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회라는 것은 단순히 행운을 잡는 좋은 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인 포착, 의미의 획득을 의미한다. 그래서 크로노스가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찾아내고 경험을 살아있는 기억으로 만들어 내는 주관적 시간을 의미한다. 미술사가들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잘 나타낸 그림으로 카라바죠의 "부르심을 받는 성 마태오"라는 그림을 예로 들기도 하는데 세금을 걷는 세리였던 마태오에게 베드로와 함께 나타나신 예수님이 손으로 마태오를 가리키며 나를 따라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가장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세리 마태오가 예수님이 부르는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아무런 권력도 아무런 명예도 없는 이름없는 무리의 지도자 한마디에 바로 일어나 그를 따랐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대학의 학과를 선택한 일, 누구와 결혼하게 된 일, 살 집을 구입한 일, 어떤 직업을 갖게 된 일, 누구를 친구로 사귀게 된 일 등등 살아가면서 선택과 결정 하나 하나가 내 삶의 대전환을 이룬 것들이기도 하고 오늘의 나를 만든 것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듯하지만 되돌아보면 순간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들로 채워져 있으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소중히 잡으라는 격언을 다시 떠올릴 일이다./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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