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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
측정표준이라고 하면 실험실의 복잡한 이론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측정표준은 알람 시계 소리에, 잠에서 깨고 온도계로 오늘 기온을 어림잡는 우리 일상생활에 이미 깊이 녹아 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길이와 시간, 온도와 질량을 재는 수많은 계측 역시 국제적으로 합의된 표준에 따라 관리된다. 만약 나라마다 1미터의 길이가 조금씩 다르거나 1초의 기준이 제각각이었다면,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가 아니라 혼란의 장이 되고 나아가 국가 간의 무역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측정표준은 단순한 기술 규격에 그치지 않고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의 기반이며, 스포츠 정신의 대전제인 공정성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스포츠 현장의 약물검사 역시 측정표준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선수의 혈액이나 소변에서 금지 약물의 존재를 판단하는 일은 단순히 정밀한 장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분석기기라도 측정표준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수치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2019년 물질량의 기본 단위 몰(mol)은 측정 기술의 발전을 반영하여 불변하는 아보가드로 상수를 기준으로 재정의됐다. 이러한 공통의 기준 위에서 화학 측정표준은 국가와 종목을 넘어 같은 잣대로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약물검사는 단순한 기술 절차뿐 아니라, 화학 측정표준이 공정성을 보증하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약물검사는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수단을 넘어,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과학적으로 지켜내는 장치가 된다.
국가표준 연구기관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숫자 하나를 바로잡기 위해 수많은 검증 절차를 반복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측정 환경이나 부품 하나가 미세하게 어긋날 때 측정 결과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은 올림픽 기록판 뒤에 숨은 긴장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밀하게 잴 수 있는 능력은 곧 기술 경쟁력의 토대가 되고, 그 신뢰는 다시 산업과 사회 전반의 혁신으로 이어진다. 나노미터 단위로 회로를 그리는 반도체 공정, 초고속 통신망의 시간 동기화, 정밀 의료기기의 성능 평가 역시 모두 같은 측정표준 위에서 가능해진다. 가장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나라가 곧 가장 앞선 기술력을 가진 나라다.
측정표준의 의미는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가치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이번 2026 동계올림픽에서도 우리는 아주 작은 차이로 승리하지 못한 선수를 안타까워할지언정 억울해하지는 않는다. 기준이 투명하고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 역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이 부재하거나, 그 기준이 상황에 따라 흔들릴 때 발생한다. 빙판 위와 실험실 안에서 작동하는 엄격한 측정표준의 원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공정성의 모델을 조용히 제시하고 있다.
폐막을 이틀 앞둔 오늘, 선수와 관객은 경기장의 긴장 속에 있지만, 그곳에서 확인한 측정표준과 신뢰의 경험은 올림픽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게 된다. 측정표준은 결코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기록의 신뢰를 지키며, 인류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정직한 약속이다. 올림픽 무대의 주인공은 선수이지만, 승부의 판정자는 언제나 표준이다. 우리가 올림픽을 통해 진정으로 확인하는 것은 메달의 개수뿐 아니라, 같은 기준 아래에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작동하는 측정표준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세계의 공정성을 떠받치는 가장 믿음직한 기반이다.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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