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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기]형광펜과 전성기

양홍석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장

이상문 기자

이상문 기자

  • 승인 2026-04-16 16:48

신문게재 2026-04-1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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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석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장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늘 새로운 기대감이 넘쳐오른다. 회사와 학교는 새로운 시작으로 분주하고 동네 문구점의 노트와 펜들은 마치 새로 피어난 꽃들처럼 보인다. 그중 형광펜은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눈길을 끈다. 나 역시 독서를 하며 형광펜을 사용하게 되었다. 말솜씨가 참신하거나 중요한 문구는 언젠가 써먹을 수 있도록 반드시 형광펜으로 표기한다. 다음에 책을 다시 볼 때 쉽게 책장을 넘기기 위해서다. 형광펜을 쓰면 영롱한 색깔로 단어들을 그어가는 맛이 있다. 그러다 보니 형광펜을 자주 사게 되고, 한 주에 한 자루씩 닳아 여러 개를 구입하기도 한다.

형광펜을 쓰며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형광펜을 오래 쓰다 보면 잉크가 마르고 색이 바래져 진다. 특히 주황색이나 분홍색의 경우가 그렇다. 조금이나마 색상을 살리기 위해 색상이 바래진 펜은 잠시 놔두고 새로운 펜을 쓴다. 오랜 시간 뛰어서 지친 선수에게 휴식시간을 주는 것처럼 기존에 사용한 펜을 잠시 책상서랍에 놓고 여유를 부여한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예전에 썼던 형광펜을 다시 한번 써보니 신기하게도 지금 막 구입한 펜처럼 더 영롱하고 강렬한 빛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쉬었기 때문에 조금 더 쓸 수 있는 생명이 연장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펜은 다시 거짓말처럼 예전의 흐린 색깔을 흩어내며 휴지통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려준다. 비워짐으로써 끝을 맺는 사물의 일생이 우리의 삶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다.

닳은 형광펜도 새것으로 교체되듯, 사람도 잘나갈 때는 반드시 한 템포 쉬어보자. 쉬지 못하면 반드시 몸과 마음이 지치게 되고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앞만 달려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지쳤는데도 멈추지 못한다. 이미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을 향해가는데 '조금만 더'라는 달콤한 말에 취해 결국은 헐어버린 자신의 자화상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전성기'일 때 쉬어가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지나치기는 어려운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나의 전성기를 오랫동안 누리고 싶지 않은가?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를 생각해봐야 한다.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을 위한 휴식을 주면 좋겠다. 내가 쓰고 있는 형광펜의 색이 아직 선명한지, 이미 흐려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나를 점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한 순간의 쉼을 참지 못하고 현재에 너무 많이 의존해 고생하고 있는 에피소드들이 주변에 많다. 야구 선수들 중 경기의 가교(架橋) 역할을 맡는 '불펜(Bullpen)' 투수는 가장 중요한 보직 중 하나이다. 경기 중 승리의 희망을 잡기 위해 일주일 6경기 중 3경기 이상을 대기해야 하는 불펜투수들은 선발투수진에서 물러나거나 구위가 좋은 신인급 투수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 불펜투수들은 등판하는 순간이 바로 전성기다. 선발투수보다 더 빠른 구위(球威)로 20구 내외로 버텨낸다. 하지만 잦은 등판은 팔과 어깨는 채 2~3년을 못가고 안식년을 갖거나 부상으로 수술대로 오르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만약 부상을 극복하더라도 이전의 구위를 회복하는 것은 결코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이어가야 하는데 이런 일들이 어찌 야구 선수들 뿐이겠는가?

형광펜 한 자루를 쉬면서 쓰면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아껴 써도 언젠가는 색이 바랜다는 것. 우리의 전성기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형광펜을 쓰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살펴보자. 부상을 당해 사라지는 선수들과 달리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잠시 뚜껑을 닫고 기다려줄 줄 아는 '쉼' 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펜뚜껑을 열었을 때,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양홍석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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