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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지우며 채워가는 사람들

윤기관 (방글라데시 DIU대학 석좌교수 겸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성일 기자

한성일 기자

  • 승인 2026-05-11 09:44
윤기관 (1)
윤기관 (방글라데시 DIU대학 석좌교수 겸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주한방글라데시 대사관에서 취업 비자를 받으려니 올해 유난히 까다롭다. 이번에는 도착 비자를 받기로 한다. 비자는 당해국 권한이므로 입국 심사에서 입국을 거부할 때, 그 이유를 묻거나 항의할 수 없다. 도착 비자료는 50달러인데 추가로 1달러를 함께 내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무사히 착륙한다. 짐 찾는 곳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오니 외국인들이 줄 서 있다. 도착 비자를 받는 중이다. 비자료 창구로 가서 51달러를 디미니 1달러를 반환한다. 1달러 관행이 지워졌다. 비자 코너에서 기다리니 곧 여권을 돌려준다.



학교에서 마중 나온 자동차로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전에는 상습정체로 80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이번에는 40분 만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자동차 전용 도로가 새로 생긴 덕분이다. 독재정권이 지워지니 도로부터 달라진다.

지난 정부 때 서민들이 이용하는 시내버스는 인도 버스 폐차장에서 철판을 구입하여 두드려 펴 버스 겉을 덕지덕지 기웠다. 새 민주 정부가 들어선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시내버스가 말끔하다. 누더기 차림의 서민 버스가 차츰 지워지고 있다. 우중충한 초록색 릭샤의 겉도 지워지고 알로록달로록하게 단장했다.

새 민주정권은 지우고 새로 채우려고 애쓴다.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생기고, 서민이 애용하는 시내버스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릭샤의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도로 벽에 독재 타도를 그렸던 벽화들이 다 지워졌다. 거리 중심부에 세워진 독재자 찬양 동상도 싹 지웠다. 그렇게 많던 걸인의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독재자들의 집도 사라졌다. 화폐에 나타난 독재자의 얼굴도 지워졌다. 독재 잔재가 사회 곳곳에서 지워지고 있다.



방글라데시 전 정부의 독재가 심해 국민은 피로했다. 그 피로는 드디어 민주화 운동으로 번졌다. 이른바 '몬순 7월 혁명'이다. 방글라데시 대학생·시민 중심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 시위는 근본적으로는 부패·독재에서 비롯된다. 발단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국유공자 후손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비중을 확대한다는 이른바 '공직 할당제' 시도이다.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여 불만이 컸던 대학생들은 울분을 터트린다.

방글라데시는 지운 독재자 흔적에 희망으로 채워가고 있다. 올해(2026년) 11월 최빈개도국(LDC)을 졸업할 예정이다. 선진국으로부터 관세 혜택과 원조가 축소될 수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정책을 잘만 시행하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2031년에 '상위중간소득국가'(Upper Middle Income Country)에 진입할 수 있다.

지난 정부는 선진국에 원조를 구걸하다시피 했다. 중진국으로 진입하면 각종 특혜도 원조도 대폭 준다. 지난 정부 위정자들의 관행이자 만행이 되어온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철저하게 지우는 게 시급하다. 새 민주 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선진국들로부터 특혜와 개발원조를 계속 받을 수 있다.



방글라데시는 지금 잘못된 과거를 지워가고 있다. 지운 자리를 더 큰 희망으로 채워가고 있다. 필자는 지금 잭푸르트 익어가는 캠퍼스를 거닌다. 방글라데시 D 대학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난 9년 동안 나아지는 방글라데시 사회를 보며 미소 짓는다. 방글라데시는 선진국 대한민국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한민국은 방글라데시 모델이다.

방글라데시는 잘못된 과거를 지우되 그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운다. '지운다'는 것은 지난날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새로이 시작한다는 다짐이다. 방글라데시는 대한민국의 절친으로 다가온다. 필자가 이 나라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윤기관(방글라데시 DIU 대학 석좌교수 겸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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