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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116-연꽃이 아름다운 관곡지(官谷池)의 건강한 밥상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최화진 기자

최화진 기자

  • 승인 2026-07-20 17:02

신문게재 2026-07-21 10면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는 조선 초기 강희맹 선생이 중국에서 가져온 연꽃 씨앗을 처음 심은 역사적 명소로, 현재는 대규모 연꽃테마파크가 조성되어 다양한 수생식물의 장관을 선사합니다. 안동 권씨 종중이 대대로 관리해 온 이곳은 전통적인 방지원도 형태를 통해 선비들의 우주관을 보여주며, 매년 여름이면 수많은 연꽃이 피어나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필자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뒤 인근 식당에서 영양 솥밥을 즐기며 시래기와 우거지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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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솥밥./사진=김영복연구가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에 가면 조선 세조 때의 연못 관곡지(官谷池)가 있다.

특히 관곡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기리기 위해 관곡지 주변 19.3ha 규모의 논에 조성한 연꽃 주제 공원인 연꽃테마파크가 있다.

특히, 여름철이 되면 수련, 홍련, 백련, 물양귀비 등 80여 종의 다양한 연꽃과 수생식물이 수면 위를 수놓아 장관을 이루는데, 7월 초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8월 중·하순 절정을 이루며, 10월 초까지도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금년에는 연꽃이 예년과 달리 화려하게 피지는 않았다.

이 연꽃테마파크는 연근 생산단지와 연꽃테마시험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화련 20품종, 수련 80여 종, 수생식물 15품종을 재배해 다양한 수생식물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필자는 우선 관곡지(官谷池)가 있는

조선 초기 문신 학자이며 화가이기도 한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선생의 사위인 사헌부 감찰을 지낸 권만형(權曼衡)의 집안에서 대대로 관리하는 사유지다.

이 관곡지(官谷池)에는 1846년(헌종 12) 권용정(權用正 1801~1861)이 지은 『연지사적(蓮池事蹟)』에 의하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강희맹은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 난징[南京]을 다녀오는 길에 중국에서도 그 자태가 곱기로 이름난 항주(抗州)의 전당강(錢塘江)기슭에 자생하는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의 씨와 뿌리를 가져와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의 작은 연못(현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에 처음 심어 키웠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전당홍(錢塘紅)은 백련(白蓮)으로서 빛깔이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끝부분만 담홍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며, 매년 6월부터 8월까지 감상할 수 있다.

헌종(憲宗) 10년(1844)에 안산 군수로 부임했던 권용정이 선조들의 고사를 확인하고 연못을 준설하였고,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계조(李啓朝)에게 서목을 올려 연못관리를 위한 연지기를 지원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작은 연못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관곡지로 1466년(세조 12)에 연꽃이 무성해져 '연성', 즉 연꽃의 고을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연지 고사(蓮池故事)라 한다.

1466년(세조12)에 이 연못에 연꽃이 무성해져 '연성', 즉 연꽃의 고을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연지 고사(蓮池故事)라 한다. 강희맹과 연지 고사는 1797년(정조 21) 8월 정조의 제10차 원행 때 안산 지역 유생들에게 시제(詩題)로 내려진다. 그 내용은 "奉使南京取錢塘紅種之號曰蓮城(봉사남경취전당홍종지호왈연성)중국 난징에 갔던 사신이 항저우[杭州]의 전당홍이라는 연꽃 종자를 가져와 읍의 별호를 연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운양집(雲養集)』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여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은『기언(記言)』제8권 서(序)에 돈간재시(敦艮齋詩)가 있는데, 여기서 돈간재(敦艮齋)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인 권대재(權大載 1620~1689)의 호(號)이다.

여기에'연성군(蓮城郡)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병산(屛山)이 있고, 그 아래에 권씨(權氏)의 옛 터전이 있다.

산 동쪽 기슭의 작은 골을 발견했는데, 땅이 깊고 형세가 막힌 데다 뭇 산이 그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어 먼 산봉우리의 자욱한 이내가 바라보였다. 암벽 밑으로 샘물이 솟아나는데 물이 맑고 차가워서 약을 달일 만하였으므로 우거진 덤불을 쳐내고 샘의 근원을 씻어 내었다. 돌 위에 늙은 단풍나무가 있어 바위 이름을 '풍암(楓巖)'이라 하였다. 풍암 밑으로 지세가 차츰 낮아지므로 샘물을 끌어다 세 개의 못을 만들었는데, 세 개의 못에 물이 가득 차서 푸른빛을 띤 깊은 물이 마치 거울과 같았다. 제일 위의 못을 '관어지지(觀魚之池)'라고 부르는데, 물이 깊어서 물고기가 즐겁게 노닌다. 그 아래의 못은 '군자지지(君子之池)'라고 이름 붙이고 연(蓮)을 심었으며, 또 그 아래는 '열물지지(說物之池)'라고 부르는데, 논밭에 물을 대기 편리하다. 그 골을 '간은동(艮隱洞)'이라고 하고, 못가에다 작은 서재(書齋)를 짓고 이름을 돈간재(敦艮齋)라 하였으니, 또한 좋지 않은가.' 이는 관곡지(官谷池)를 말하는 것이며 연성(蓮城)은 바로 이곳의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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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관곡지./사진=김영복연구가
한편 이곳 관곡지는 강희맹의 딸과 연이 닿은 권만형(權曼衡)이 물려받은 이래 대대로 안동 권씨 화천군파(花川君派)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연꽃의 성쇠로 권씨의 흥망을 점친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무렵에는 경기감영의 승인을 받아 안산군 차원에서 관리인을 뽑아 신역을 면제하는 등 체계적으로 연지(蓮池)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19세기 고종 대에 이르러 연지기에게 잡역을 부과하고 관리가 소홀해지는 폐단이 발생하자 안동 권씨(權氏) 종중(宗中)은 선산의 나무를 팔아 연못을 보수하였다.

종중(宗中)의 재산이라기보다 마을 공동체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고택은 지금도 사유지라는 팻말과 함께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다만 고택 앞 관곡지만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관곡지는 면적이 약 130평(가로 23m, 세로 18.5m) 정도의 네모진 형태의 연못으로 이 연못 안에는 연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웃고 있었다.

연못 안에는 둥근 섬이 있고 방지원도(方池圓島)의 형태를 따르고 둥근 섬에는 소나무가 식재되어 있었다.

방지원도는 동양의 우주관이나 자연관에서 온 것으로, 이는 음양 사상과도 연결된다. 방지원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서 유래되었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혹은 '음(陰:땅)은 네모지고, 양(陽:하늘)은 둥들다' 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간 섬에 소나무를 심는 것은 신선(神仙) 사상(思想)에서 유래되었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의미하는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선비들은 집 안 혹은 밖에 연못을 만들고, 그 속에 신선이 사는 작은 섬을 만들어 생전에 신선과 교우하고 자신이 신선이 되고자 한 것이다.

관곡지를 나와 연꽃테마파크로 나왔다.

백련단지를 지나 수련지(水蓮池)를 따라 걷다 보면, 붉은빛으로 물든 홍련지(紅蓮池)에 꽃봉오리가 활짝 핀 분홍 꽃송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함께 간 아내를 큰 꽃송이 옆에 세워 사진 몇 장 찍어 본다.

중앙 연못에는 오리가 수련 사이에 쉬고 있고, 보랏빛 수련과 탈리아, 노랑어리연꽃, 부처꽃이 색채를 더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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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골쌈대장./사진=김영복연구가
연밭에 왔으니 혹여 연(蓮) 음식을 하는 곳이 없을까 찾아봤으나 관곡지에서 9km 정도 떨어진 곳에 '고연'이라는 연밥 음식점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집은 일요일은 정기 휴무일이다.

성주산과 봉매산 사이로 난 좁은 길로 호현로, 소사로, 범안로 등 부천과 시흥을 잇는 도로 중 가장 거리가 짧은 도로인 시흥시 대야동에서 하우고개를 거쳐 부천시 심곡동 하우고개 입구 교차로를 잇는 도로에 위치한 시흥의 맛집'하우골 쌈대장 시흥시 하우로 122번길 4 전화 0507-1468-3301'으로 향했다.

이 집은 매장도 깔끔하고 주차장도 여유가 있지만 문어 솥밥, 전복 솥밥, 고등어 솥밥 등 음식들이 독특한 영양밥이라 할 수 있지만 신선한 쌈채가 셀프 코너에 있었다.

우리는 보통 쌈 채소로 먹는 것은 12가지에서 15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상추, 배추, 깻잎을 비롯해 적근대, 케일, 고추 등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시선에 제일 먼저 들어 오는 것은 쌈채보다 채소와 함께 진열해 놓은 셀프 코너의 된장 우거지가 먹음직해 보였다.

우린 고등어 솥밥을 시켰는데, 어차피 '된장 우거지'는 셀프이니 염체 불구하고 접시를 들고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시래기와 우거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적어 본다.

흔히들 무청 말린 것은 시래기, 배춧잎 말린 것은 우거지라고 하지만『표준국어대사전(標準國語大辭典)』에는 무청이나 배추잎 말린 것 모두 시래기라고 한다.

고사리나물처럼 '시래기'도 무청이나 배추잎을 말린 묵은 나물의 일종이다.

보통 겨울을 대비해 채소를 쌓아 두는 것을 한문으로 지축(旨蓄)이라고 한다.

기원전 470년 편찬된『시경(詩經)』「곡풍(谷風)」에

"我有旨畜(아유지축)내가 마른나물 장만하는 것은

亦以御冬(역이어동)겨울을 넘기기 위한 것이네

宴爾新昏(연이신혼)그런데 그대는 신혼의 젊은 여자에 빠져

以我御窮(이아어궁)나를 궁할 때만 이용하고

有洸有潰(유광유궤)심술부리고 성만 내며

旣?我肄(기이아이)내게는 고생만 시켜 왔네.

不念昔者(불념석자)옛날 내가 시집왔을 때

伊余來?(이어래기)나를 사랑했던 일을 생각해 보지 않으려나."

라는 시(詩)에 최초로 시래기[旨畜]이 등장한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며 학자였던 권근(權近 1352년~1409년)도『양촌집(陽村集)』에 겨울철 채소를 비축·보관하는 축채(蓄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적었다.

"十月風高肅曉霜(십월풍고숙효상)시월이라 거센 바람 새벽 서리 내리니 園中蔬菜盡收藏(원중소채진수장)채소밭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 須將旨蓄禦冬乏(수장지축어동핍)맛있는 채소 갈무리 겨울 대비하니 未有珍羞供日?(미유진수송일상)진수 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寒事自憐牢落甚(한사자련뢰락심)쓸쓸한 겨우살이 스스로 가엾나니 殘年偏覺感懷長(잔년편각감회장)만년이라 감회가 깊음을 깨닫겠네 從今飮啄焉能久(종금음탁언능구)앞으로 먹고 마심 얼마나 오래랴 百歲光陰逝水忙(백년광음서수망)백년 광음이 유수처럼 바쁜 것을 "

일부 학자들은 축채(蓄菜)나 지축(旨蓄)을 김장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선 초나 그 이후 김장을 축채(蓄菜)나 지축(旨蓄)이라 하지 않았다. 김치 역시 침채(沈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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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우거지(시래기)./사진=김영복연구가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9년~1241년)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무를 소금에 절여 구동지(舊冬至)를 대비한다"는 구절이 있고, 『해동잡록(海東雜錄)』성현(成俔, 1439년∼1504년)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채를 배추라 하여 한양 성문 밖에 많이 심어 이익을 많이 본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배추를 심어 먹은 것으로 보이나 중국에서 종자를 들여와 재배했기 때문에 꾸준한 생산은 어려웠고, 1800년대 이후 결구배추가 들여오면서 부터 안정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축채(蓄菜)나 지축(旨蓄)을 김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물론 조선시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가정의 1년 계획으로 봄 장 담그기와 겨울 김장담그기가 중요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하오리다. 앞 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鹹淡)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양지에 가가(假家)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라는 내용이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집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10월조에 실려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도 "龍門旨蓄國中名(용문지축국중명)용문산(龍門山) 묵은 나물 온 나라에 유명한데, 採採盈筐寄海城(채채영광기해성)따고 따서 한 바구니 해촌(海村)에 보냈구려"라고 했다. 『성호전집(星湖全集)』

시래기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본론으로 가'하우골 쌈대장'의 전복솥밥은 고소하고 풍미가 깊다는 평가가 있고, 문어솥밥은 질기지 않고 쫄깃하다. 쌈정식 쪽은 제육과 고등어구이를 많이 찾는 흐름이며, 반찬이 다양하고 간이 자극적이지 않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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