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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브 루스/사진=위키백과 |
미국 뉴욕 양키즈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본명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의 스토리는 ‘No.3’의 히스토리를 만들었다. ‘No.3’은 베이브 루스를 위한 영구결번이다. ‘홈런 야구 시대’를 주도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베이브 루스를 기리는 숫자다.
그를 대표하는 숫자는 또 있다. 22시즌 714개 홈런, 2217타점, .342의 타율, 17시즌 12번 홈런왕은 1935년 그가 은퇴할 때까지 세운 기록들이다.
그의 역사적인 기록은 성 마리아 실업학교 야구팀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중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잭 던 감독의 눈에 들어 1914년 마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스토리는 시작됐다.
7월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베이브 루스는 좌완투수로 승승장구했으며, 타자로도 95경기에서 10개나 넘는 홈런을 때리며 아메리칸 리그에서 홈런왕에 등극했고, 타자로 전향하면서 1919년에는 29개 홈런을 치며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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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으로 팬들 앞에 모습을 보인 베이브 루스의 이 장면은 1949년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을 수상했다./사진=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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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주가를 달리던 베이브 루스는 1920년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다. 그것도 ‘현금 트레이드’였는데, 이유는 레드삭스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가 뮤지컬 제작 비용을 갚기 위해 이적시켰고 이로 인해 팬들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레드삭스는 이 후 2004년까지 86년간 월드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밤비노의 저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베이브 루스 때문에 생긴 저주였다.
반면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루스는 첫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뉴욕 양키스를 최고의 명문팀으로 올려놓았다.
수많은 기록을 경신하는 놀라움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고 홈런의 전설’이 그것이었다. 1932년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배트로 가운데 펜스를 가리키며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면 충분하다”라는 말을 한 후 홈런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전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선수 말년에 잦은 술로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성적도 예전만 같지 않았던 베이브 루스는 1935년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방출됐고, 그 해 6월에 은퇴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베이브 루스’는 미국 야구의 히스토리가 됐다.
오늘(16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8년이 되는 날이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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